프랭키(프랭크 시나트라)가 마약 치료를 마치고 커다란 드럼가방을 메고 마을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에겐 꿈으로 가득차 설레이는 마음으로 얼굴엔 희망이 두둥실 피어올라 있었다. 카지노 딜러와 마약중독으로 살았던 시절에는 그 마을은 자신에게 고통만 안겨주었지만, 다시 돌아온 그 마을은 밴드의 오디션에 합격하여 멀리 기적을 울리며 달려오는 기차를 타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간이역의 친근함을 품고 있는 곳으로 변했다. 지금 프랭키는 마약의 유혹도 이겨낼 자신이 있으며, 담배연기 자욱한 삼류카지노의 딜러로 사용하던 황금팔을 드럼 스틱으로 리듬을 맞추는 황금팔로 변화시킬 자신도 있다. 즉,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는 프랭키가 그 희망을 이루는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를 보여주면서, 다른 한편..
미국의 역사를 다루는 서부 영화에서 주인공은 항상 히어로가 되기 위해 말을 타고 달린다. 이런 히어로는 정의의 편에 서야하고, 그 정의란 국가의 이상을 몸에 체득하고 있는 인물이 어야 하며, 또한 당대의 도덕적 가치관을 지키기 위한 보수적인 관점이 요구된다. 그들이 서부의 보안관이든, 혹은 존 포드 감독의 에 나오는 링고 키드같은 범죄자라도 히어로적 속성을 지닌 캐릭터들의 성격은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서부극 영웅들의 모습들이 최근 특수효과를 동반한 슈퍼맨, 스파이더맨, 배트맨과 같은 영우들의 모태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재미있는 것은 서부극에 수정주의 서부극이 등장하였다면, 90년대 이후의 초인물에서도 수정주의적 초인물이라 할만한 캐릭터의 변화가 눈에 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텍스트는 결..
영화 제목이 왜 플랑드르 일까 생각해 보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프랑스의 시골이 플랑드르라는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프랑스에서는 플랑드르라는 말이 시골, 비산업화 같은 뜻으로 일반적으로 이미지화 되어 있는 곳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프랑스인들에게 플랑드르라는 말은 순수, 고향, 모성 등등의 늘 따라다니는 이미지도 더불어 생각해 낼 수 있다고 본다면 플랑드르라는 말은 일종의 ‘마음의 고향’쯤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놓고 보니 문제가 심상치 않다. 이 ‘마음의 고향’에 살고 있는 이제 20대를 지난 듯한 젊은이들의 생활은 무척 무미건조해 보이기 때문이다. 플랑드르가 프랑스의 시골을 상징한다면 이 젊은이들은 프랑스의 시골 젊은이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을텐데, 이 젊은이들에게 희망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살인을 할 수 있는 라이센스를 부여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헌터라는 게임의 참가자들로, 총 10번의 게임에서 살아남으면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살인게임을 만든 이유가 사람들의 공격성을 완화시켜 사회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이라는데, 이것은 엘리오 페트리 감독의 의 주인공인 마르첼로와 캐롤린이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다. 이제 캐롤린은 10번째 희생자만 만들면 부와 명예를 손에 쥘 수 있다. 막 9번째 희생자를 죽인 후이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스타가 되었고, CF계약이 성사된다. CF의 내용은 10번째 희생자가 죽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제품을 광고한다는 것이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고 해도 영화란 결국 당대의 현실에 대해 발언하고 싶어 하는 운명이다. 엘리오 페트리 감독 역시..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미군들의 감시하에 생활하던 한 무리의 아파치들이 말을 훔쳐 달아나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들의 도주가 위험한 이유는 그들이 지나가는 지역에 살고 있는 백인 정착민들에 대한 약탈과 방화, 강간이 발생할 가능성이 100%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단 부분만 본다면 영화는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미국 기병대와 비도덕적이고 추악한 인디언과의 싸움에서 미군의 승리로 마무리되며 평화의 시대가 오리라로 끝날 것처럼 보이지만,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의 영화에서 “설마 그럴리가...“ 탈출한 아파치들을 뒤쫒는 기병대의 지휘관은 이제 막 사관학교를 졸업한 드뷘 소위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이며, 그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는 아파치들도 분명 교화 될 수 있다고 믿는 이상주의자다.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과 똑같..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를 볼 때마다 항상 시네마틱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영화라는 것이 뭘까?’ 혹은 ‘영화와 연극이 다른 점은 뭘까?’와 같은 이런 원초적인 질문들 말이다. 명확한 해답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영화라고 하면, 나는 뭔가 활동적인 것들, 그러니까 다양한 시청각적 영상미를 공감각적으로 느끼길 원하곤 한다. 이건 비단 할리우드 영화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아트필름들에서도 동일하게 느끼게 되는 부분들이다. 그런데 에릭 로메르의 영화는 다르다. 정말 연극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로메르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주구장창,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만 한다. 그러니까 영화적이라고 흔히 말해지는, 미학적인 촬영을 구경하는 것도, 복잡한 편집스타일을 느낄 새도 없이, 영화 시간 내내..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는 참 많이 감동적이었다. 슬픈 장면이 없음에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나는 마틴 스콜세지의 갱스터 걸작들 보다는 같은 영화들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는 마틴 스콜세지의 다른 영화에 비해 묵직한 메시지보다는 ‘영화란 무엇인가’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열정’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다. 영화에 대한 많은 담론이 넘쳐나지만, 를 보고 나면 결국 영화는 꿈이라는 것, 환상을 통해 꿈을 실현하는 것, 그래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먹고 살기 위해 하루의 노동에 지친, 삶에 지쳐가는 대중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피로를 풀어주는 것이라는 것, 그러니까 삶에 대한 위로라는 것일 거다. 그리고 실제 삶과 영화 속 삶을 조화시키는 능력의 차이가 감독을 예술가로 만드는 것..
나루세 미키오 감독이 1941년에 만든 는 정말 간결한 이야기. 착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속에 감독의 사회 비판 정신도 오롯이 숨어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참 흐뭇해진다. 10대 중반의 다카미네 히데코의 해맑은 모습과 더불어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소시민의 모습이 마음을 참 편하게 해준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긍정적 에너지를 잃지 않고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려는 버스차장 코마의 밝은 모습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자신이 일하는 버스가 경쟁회사의 최신 버스에 밀려 손님이 없어 코마는 속이 상한다. 어느날 관광버스 안내원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듣고 난 후, 코마는 버스가 지나가는 노선에 있는 중요한 유적을 안내하면서 손님을 유치해 보자고 제안한다. 운전사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