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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미군들의 감시하에 생활하던 한 무리의 아파치들이 말을 훔쳐 달아나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들의 도주가 위험한 이유는 그들이 지나가는 지역에 살고 있는 백인 정착민들에 대한 약탈과 방화, 강간이 발생할 가능성이 100%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단 부분만 본다면 영화는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미국 기병대와 비도덕적이고 추악한 인디언과의 싸움에서 미군의 승리로 마무리되며 평화의 시대가 오리라로 끝날 것처럼 보이지만,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의 영화에서 설마 그럴리가...“

 

탈출한 아파치들을 뒤쫒는 기병대의 지휘관은 이제 막 사관학교를 졸업한 드뷘 소위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이며, 그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는 아파치들도 분명 교화 될 수 있다고 믿는 이상주의자다.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과 똑같은 문명인으로서의 드뷘 소위는 아마 관객과 가장 당대적인 시선을 공유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의 관점이 변해가면서 관객의 관점도 변해간다.

 

드뷘 소위는 아파치들이 피해자를 고문하거나 신체를 훼손하는 일을 야만적이라며 경멸하며 백인들 -소위 말하는 문명인-은 그런 면에서 그들과 다른 위치에 선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그의 부하들이 아파치와 똑같은 행위로 복수하려는 데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로써 선과 악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드뷘 소위의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묻어주라 buried”는 것이다. 매장한다는 것. 그것은 가장 문명/이성적인 행위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뭔가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어떤 것과 함께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침략행위들을 묻어버리고 싶은 감독의 소망이 응축된 대사는 아니었을까?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은 누구의 편에 서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에 무관심하다. 영화 내내 어떤 선택도 하려고 들진 않는다. 오히려 아파치는 왜 그런 행위를 하는가에 대한 근거를 확보하려고 한다. 단지 자신의 땅을 침범한 백인들에 대한 증오심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는 백인중심적인 사고를 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그들이 미군에 의해 감금당함으로써 빚어지는 남성성의 상실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것의 회복 과정이 성인남자를 죽여야 하며, 말을 훔치고, 여기에 약탈과 방화, 강간등의 행위가 동반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파치의 전통/사는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알드리치 감독은 이러한 행위와 방식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백인에 의해 강제적으로 야만으로 규정된 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억압당해 온 것들에 대해 편협한 시선에서 벗어나 좀 더 광의적으로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한다고 보여 진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행위들이 시대가 변함으로써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불필요한 방식임을 분명하게 제안한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의 시대를 맞이하려는 것일까? 맥킨토시(물론 낡은 사고를 가진 인물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는 스스로 구조를 거부하고 목숨을 버리려 하고, 울자나는 새로운 시대의 아파치 케니테이에게 목숨을 잃는다. 사고의 변화를 경험했을 드뷘 소위와 케니테이는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을까? 영화는 죽기 일보직전의 맥킨토시의 모습에서 프리즈 프레임으로 여운을 주며 끝난다. 그것은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이 드뷘 소위와 케니테이 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맥킨토시와 같은 편협하지 않은 사고를 가져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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