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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를 다루는 서부 영화에서 주인공은 항상 히어로가 되기 위해 말을 타고 달린다. 이런 히어로는 정의의 편에 서야하고, 그 정의란 국가의 이상을 몸에 체득하고 있는 인물이 어야 하며, 또한 당대의 도덕적 가치관을 지키기 위한 보수적인 관점이 요구된다. 그들이 서부의 보안관이든, 혹은 존 포드 감독의 <역마차>에 나오는 링고 키드같은 범죄자라도 히어로적 속성을 지닌 캐릭터들의 성격은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서부극 영웅들의 모습들이 최근 특수효과를 동반한 슈퍼맨, 스파이더맨, 배트맨과 같은 영우들의 모태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재미있는 것은 서부극에 수정주의 서부극이 등장하였다면, 90년대 이후의 초인물에서도 수정주의적 초인물이라 할만한 캐릭터의 변화가 눈에 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텍스트는 결국 자기반성의 길로 가는 운명이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결국 장르는 반성을 통해 진화하는 것인가 보다.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이 데뷔하던 54년에 발표한 세편중 가장 늦게 공개된 <베라 크루즈>는 악당이 독점했을 법한 성격화인 비열함, 이기심과 같은 하위의 가치들을 등에 업은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남북전쟁에서 패한 남군 장교인 벤자민 트레인과 건달이라고 부르면 딱 어울릴법한 조 에린은 식민지의 황제에 저항하는 민중운동이 한창인 멕시코의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한 몫 단단히 챙길 생각으로 길을 떠나는 중이다. 그들은 정의보다는 돈을 더 많이 주는 쪽의 용병이 될 생각이다.
영화 초반부에 시민군의 지도자는 벤자민과 조에게 정의를 위해 싸워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돈을 따라 화려한 황제의 궁정으로 향한다. 그리고 황제군의 용병이 되어 황금을 베라크루즈로 이동하는 데 투입된다.
서부극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베라 크루즈>는 강탈 영화적 재미가 강한 작품이다. 서부사나이들의 총질보다는 황금을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벤자민과 조 외에 황금을 독차지하려는 백작부인까지 가세한 이 다툼은 시종일관 반전을 거듭하며 진행된다. 그 와중에 다양한 인물을 통해 인간의 탐욕을 전시한다. 하지만 영화가 인간의 탐욕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다. 탐욕 속에 숨어있는 인간적 감정, 즉 정의를 지향하는 마음이 있고 그것이 중요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엔 벤자민이 대의명분으로 돌아선다는 것에 대해 ‘알드리치가 이렇게 쉽게 타협하나’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끝까지 막장으로 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주길 바랬던 것일까? 하지만 영화가 성찰이 없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해지겠는가? 제대로 된 영화에는 어떤 방식이든 항상 성찰이 있었다는 것. 그 성찰이 관객과 함께 제3의 담론을 만들어낼 때 위대한 영화가 된다고 한다면, 막장으로만 치달으려는 관객의 욕망에 약간의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것이 재능 있는 감독의 능력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베라 크루즈>는 뛰어난 대중영화의 모범이 될 만하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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