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기대도 안했는데 의외로로베르트 슈벤트케의 레드를 허허실실거리며 나름 재미있게 봤다.CIA, 은퇴한 킬러들, 라틴 아메리카하면 딱 떠오른다.이 영화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더군다나 전형적인 헐리우드산 영화가 아닌가? 그 물줄기가 샛길로빠질 염려는 아예 접어두시라.그만큼 이 영화는 1급 배우들이 출연하는 킬링타임용 영화로적당한 영화인 것이었고그래서 별 기대없이 그럭저럭 “재미만 있으슈” 하며 선택했던 것이다.그리고빙고... CIA에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의 종이 되어 갖은 못할 짓을 해온역전의 용사 노인네들이 그 못할 짓 때문에 제거의 대상이 되었고그들의 뒤를 이어 현재 못할 짓을 주 업으로 하는 젊은 후배는목숨 내 놓으라고 달려온다는 이야기인데,알고 봤더니 못할 짓은 한 막돼먹은 인물이..
하트비트를 보기 전에는 칸느영화제에서 각광받았다는 자비에 돌란이라는 89년생 감독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약관의 나이에 만들고 깐느영화제에서 화제를 모았다는 데뷔작 부터 두 번째 작품 까지 20살짜리가 만들면 얼마나 잘 만들었겠나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었다.그.런.데.이번에 를 보면서는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음악계에 약관의 실력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상기해 보면서 영화계에는 없으라는 법도 없지 하면서... 국내에도, 비교하기가 민망하긴 해도 최야성이라는 선배가 있지 않는가 말이지. 비록 영화의 완성도면에서는 죽만 쑤다 사라져버리긴 했지만 말이다.하.지.만.자비에 돌란은 재능으로 똘똘 뭉친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치기어린 도전은 아니었다는 거다. 그가 두 번째 영화인 에서 보여준 영상들은 20살..
조엘 코헨은 온통 하얀 세상(살만한 곳이라고 믿고 있는)에서 피(그것의 내부)를 부각시키고 싶었나 보다. 그 속에서 한 중산층 가족의 비극을 보며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 냉소를 보내고 있는 듯싶다.선명한 붉음… 그것은 화려하게 포장되어 있는 건물(집)들의 내면이다. 쌍둥이 빌딩으로 상징되는 화려함으로 도시(사회/세계)는 만들어져 있고 인간이라는 동물은 그것을 통해 스스로 지적인 존재라고 우기며 만족해하고 있다. 그러나 드러남의 내면에 있는 그것들의 내부는 어떤가? 그 건물들 속에서 살고 있는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서서히 썩어들어가고 있다. 그것은 지금의 우리 사회가 숨긴 채 어디선가 곪고 있는 상처의 드러남인 것 같다. 하얀 세상에서 붉은 피는 너무 선명해서 보지 않으려 해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이 시작되면서 에릭 로샹은 동정없는 세상 한편으로 프랑스 영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만큼 동정없는 세상은 힘이 있는 영화다. 고학력이면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는 이뽀라는 실업자의 생활을 통해 감독은 고도로 발전했다고 하는 이 세상이 젊은이들에 과연 무엇을 주었는가?를 보여준다. 그 희망없어 보임을 통해 에릭 로샹은 세상을 향한 분노를 표출한다. 90년대 접어들면서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는 붕괴했고 그로 인한 유럽의 통합은 과속화됨으로써 유럽은 거대한 시장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더욱 단단해진 자본주의는 가속도를 내고 달린다. 이렇듯 급박한 이데올로기의 붕괴와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감독은 시선을 던진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말하곤 한다. 살아간다는 것이 별로 재미있지는 않아요. 나는 꼭 어떤 울타리에 같혀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지루하죠.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요. 하지만 그럴수가 없어요.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소나티네도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기타노 감독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리한 일상과 삶이라는 것의 무미건조함을 알고 있는 감독이다. 그가 데뷔작인 그 남자 흉포하다에서부터 보여주고 있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 일상의 무료함이다. 폭력은 그 일상속의 한 부분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일상이 계획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듯 그의 영화에서 폭력은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 일상이 되어 버린 폭력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옆에서 칼부림이 나도 관심이 없다. 단지 싸우고 죽이는 것이 직업인 것이다...
어쩌다 보니 또 음악이 유명한 영화를 보게 되었다. 어릴때 TV에서 봤던 영화인데, 몇 장면은 늘 기억 한켠에 남아있는 영화였다. 죠반나가 안토니오를 만난 후 슬픔을 참지 못하고 기차로 뛰어오르던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지만, 나는 특이하게도 러시아에 살고있는 안토니오가 마샤와 함께 이사하던 트럭 장면도 늘 기억이 나곤 했다. 안토니오의 쓸쓸한 표정 때문이었을까? 이 장면은 나중에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에 박중훈과 유혜리가 변두리로 이사가는 장면에서도 기시감을 느낄 정도로 비슷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다시 본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의 해바라기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재미있었고, 그때보다 오히려 더 슬픈 영화였다. 삼각관계야 멜로드라마 장르에서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고, 또 여러 형태로..
포스터가 호기심을 자극해 보게 된 은 인상적인 한 장면이 아니라 영화 전체가 강렬하게 다가 왔다. 2시간 내내 강렬했던 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두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동일한 사건일 수 있는' 장면 2개다. 그 두 장면은 이렇다. 1.왜? 아버지는 자신의 딸과 아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려고 했는가?2.왜? 원주민 소년은 갑자기 자살한 것일까? 영화의 시작은 숨막힐 듯한 도시의 일상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곳에서 소녀와 소년(딸과 아들)은 도시가 요구하고 강요하는 규칙에 자신들을 길들이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다. 주로 교실 혹은 실내 공간을 점유하는 소녀의 얼굴은 매우 지쳐 보인다. 그녀가 육체노동을 하는 장면은 없다. 그저 의자에 앉아있을 뿐이다. 단지 사람답게 살기..
왕가위의 영화에서 홍콩의 반환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지우기는 쉽지 않다. 물론 분명한 정치색을 띤 채 노골적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늘 반환의 불안을 관계의 불안함으로 치환한 채 보여주곤 했다. 하지만 는 그의 불안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1997년이라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그가 의식하든 안하든 그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왕가위 감독은 주술사가 되기로 한다. 원시 사회에서 미래를 점치며 마을의 액운을 몰아내는 주술사의 역할을 기꺼어 떠맡으며 불안한 미래를 짊어진 홍콩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토해내려고 단단히 작정을 한 듯 하다. 그렇다면 왕가위가 굳이 왜 동성애라는 소재를 들고 나왔을까? 이 영화에서 동성애자라는 것이 그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