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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가 호기심을 자극해 보게 된 <워커바웃>은 인상적인 한 장면이 아니라 영화 전체가 강렬하게 다가 왔다. 2시간 내내 강렬했던 <워커바웃>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두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동일한 사건일 수 있는' 장면 2개다.
그 두 장면은 이렇다.
1.왜? 아버지는 자신의 딸과 아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려고 했는가?
2.왜? 원주민 소년은 갑자기 자살한 것일까?
영화의 시작은 숨막힐 듯한 도시의 일상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곳에서 소녀와 소년(딸과 아들)은 도시가 요구하고 강요하는 규칙에 자신들을 길들이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다. 주로 교실 혹은 실내 공간을 점유하는 소녀의 얼굴은 매우 지쳐 보인다. 그녀가 육체노동을 하는 장면은 없다. 그저 의자에 앉아있을 뿐이다. 단지 사람답게 살기 위한 규칙과 규율을 훈육 받고 몸에 새겨야 하는 것의 힘듬, 더군다나 '사람답게 살다'라는 명제가 현대/지금이 요구하는 문명인이라는 등록증을 받기 위함이다보니 그녀의 지친 얼굴은 고스란히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얼굴과 겹쳐 보인다. '나'가 아닌 '너'의 인증이 무한가치를 동반하는 세계에서 그녀의 고달픔으로 지친 얼굴은 ‘너’를 위한 무개성의‘모두’의 얼굴로 치환되어 버린다. 더불어 그녀의 어린 동생-소년은 그녀와는 반대로 실외의 공간을 차지하고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도 소년은 학교 운동장에 있거나, 신호등이 지키고 서있는 건널목에 위치하고 있어 역시 어떤 테두리에 갇혀 있는 것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감독이 이러한 도입 시퀀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학습되는 ‘사람되기’ 순서는 실외에서 헤게모니가 정해놓은 선(건널목, 도로 등)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며(규칙을 벗어날시 차에 치이거나, 아니면 어떤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좀 더 자라면 실내에서 문자로서 그것을 자신의 몸과 뇌에 새겨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위적인 직선과 잘 구획된 도형의 이미지가 도시와 현대의 것이고, 이 선 위에서 위태롭게 걸어 다니는 것이 사람/인간/현대인/문명인이라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습득한 진실이었고 더 나아가 가장 안전한 생존형태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었다.
<워커바웃>에서 이러한 도시와 대비되는 공간은 황량하고 거대한 사막이다. 사막은 선이 지워져버린 공간이다. 선이 지워졌다함은 규칙도 힘을 쓰지 못하는 원시의 공간이다. 달리말해서 위험이 상존하는 공간이기도 한 셈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소녀와 소년은 아버지로부터 총격을 받는다. 인간이 역사라는 시간을 통해 현대인/문명인이라는 이름으로 쌓아올린 가부장제의 질서를, 그 질서의 장본인이 아버지는 선과 도형이 사라진 공간에서, 저 먼 태고의 원시적 분방함을 잠시 드러내지만, 스스로 만든 질서의 거부는 존재의 상실을 의미하므로 결국 아버지의 공격(공격무기가 총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은 당연히 실패하고 그들(소녀/소년, 딸/아들)은 무사히 살아남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머리에 직접 총을 쏘며 자살해 버린다. 이제 망망한 사막에 남겨진 소녀와 소년은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나갈 것인가? 그들은 이 원시속에서 살아갈 어떠한 방법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문명은 라디오인데, 하지만 이 문명의 물건은 그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들은 이제 스스로 살아남아야하지만 그러기엔 그들은 너무 문명화되어 버렸다.
그들이 거의 죽음 일보직전까지 갔을 때 만나는 사람이 또 다른 소년이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며, 현재 전통의식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바로 workabout 의식.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이 의식은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성인식으로 일정한 나이가 된 남자아이는 6개월 동안 사막의 혹독한 환경에서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고 비로소 성인으로 인정받게 되고 아버지/남편이 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선과 도형의 규칙속에서 혹독하게 성인식을 치러야 하는 소녀와 소년, 그리고 혹독한 사막의 환경에서 성인식을 치러야 하는 원주민 소년... 이들은 이제 같이 워커바웃(?)을 수행하게 된다. 원주민 소년의 경험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생존의 조건이 된다. 소녀와 소년이 받았던 그 힘들었던 교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왜 아니겠는가? 사막에는 미리 그어져 있는 선이 없다. 그러다보니 주어진 방향도 없다. 그러고 보니 뱡향이 없으면 꼼짝도 못하는 것이 현대인인가 보다 생각하게 된다. 이제 그들은 유사가족을 형성하게 된다. 도시의 규칙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들은 다시 사막의 규칙속에 들어가게 된다. 다만 이 공간에서는 언어와 문자가 필요 없는 또 다른 세상이기는 하다. 이제 원주민 소년은 새로운 세상의 지배자/아버지가 되어 그들을 보살피게 된다.
하지만 그 여정의 끝에서 다시 한번 비극은 되풀이된다. 사막에서 아버지가 자살했듯, 이제 문명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막의 끝에서 다시한번 아버지는 자살한다. 원주민 소년은 소녀에게 열심히 구애한다. 그것은 자신의 질서 속으로 들어오라는 몸짓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거부당하자 소년은 스스로 목을 메달고 만다. 경계에서 두 질서는 충돌한다. 가족을 지켜줄 수 없을 때 아버지는 좌절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헤게모니였다. 사막에서 도시의 아버지는 미쳐버리듯, 도시에서 사막의 아버지는 힘이 없다. 힘이 없는 절대자는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스스로 단정해버리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결국 글 초반에 했던 두 개의 질문은 같은 대답을 향해 가는 두 갈래 길이었던 것이다.
'워커바웃'이라는 성인식을 거친 소녀는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다. 그녀의 선택 여부에 따라 이 영화는 색깔이 달라졌을 것이다. 니콜라스 뢰그 감독은 소녀가 도시를 선택하게 함으로써 냉정한 절제를 행사한다. 사실 그녀는 원주민 소년을 선택 할 수도 있었다. 그 힘겨운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다움의 증명을 선과 도형에서 찾기로 한다. 아마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결론일지도 모른다. 판타지가 아닌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니콜라스 뢰그 감독의 목표였던 것 같다. 이미 인간은 자연속에서 살기에는 너무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 그리움, 모성으로서의 평화로움 등을 제공하는 자연이라는 이름은 이데아에서나 존재한다는 것을.
마지막 에필로그.
시간이 흘러 주부가 된 소녀는 선과 도형으로 구획되어진 결정체이자 문명의 상징이라 할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다. 퇴근하고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며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 창밖으로 역시 깨끗하게 구획된 도시와 아늑하게 보이는 풀장도 보인다. 모두 네모이며, 가장 현대적인 이미지다. 그리고 위협이 제거된 가장 안심되는 공간안에서 소녀는 남편과 키스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원주민 소년과 동생과 함께 나체로 수영하던 에덴의 동산을. 그 평화롭고 자유가 넘치던 순간을... 하지만 그것은 현대인들은 염원만 할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일 뿐이다.
좀 더 나아가 본다면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시점을 소녀에게 맡기고 있는 것은 아마도 소녀가 도시와 원주민 소년 중 어떤 것을 선택하든 결국엔 누군가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몸을 맞춰 살아가야 한다는 것엔 변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감독은 앞으로 가부장적 헤게모니를 갖게 될 소년보다는 소녀를 통한 동일시를 통해 현대와 현대인이라는 것에 대해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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