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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 살짝 반전이 예상되기도 했지만, 그게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아도 좋을만큼, 영화 내내 긴장감을 유지할 만큼 흥미진진했다. 이 영화는 감상의 방점을 반전에 두느냐, 아니냐에 따라 느낄수 있는 재미가 차이가 날 수 있다고 보는데, 개인적으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서프라이즈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해 보였고, 나 역시 반전이라고 할 만한 그 부분이 크게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영화를 끝까지 즐길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면 그 원인을 가장 먼저 색채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유난히 한가지 색만 탈색된 듯한 색채감. 바다와 하늘을 뒤덮은 회색톤의 그 불투명성은 영화 내내 기묘한 수수께끼를 품고 있는 듯 하면서도 고전 회화를 보는 듯한 웅장함을 품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영화의 내용과 어울리는 로버트 리차드슨의 촬영이 우선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
<셔터 아일랜드>는 1급 정신병자들이 수용된 병원에서 실종된 레이첼 솔란도의 행방을 쫒는 형사 테디 윌리암스의 이야기다. 1차적으로는 주인공인 테리 윌리암스의 상태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영화는 테디 윌리암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윌리암 래이디스로 밝혀지는 과정을 담고 있고 알고 보니 모든 사건이 래이디스의 치료과정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래이디스가 정신병원에 오게된 원인은 무엇인가? 이것을 단서로 해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의미를 확장해 나간다. 먼저 래이디스라는 개인을 봤을 때 가장 큰 원인은 아내의 우울증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3명의 자식들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죄책감이 트라우마가 되어 정신병의 원인으로 보여지고 있다. 반면 의사인 존(벤 킹슬리)이나 시한(마크 러팔로. 척으로도 등장)는 그의 폭력성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결국 이렇게 대립된 상황판단은 개인의 이야기를 보편적인 인류의 이야기로 확장시킬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우선 래이디스가 상상속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인물 테디 윌리암스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그는 2차 대전에 참가한 참전군인출신의 형사로, 그가 목도한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키는 수용소의 풍경은 지옥도와 다름 아니다. 그 속에서 독일군이 저지른 학살의 끔찍한 현장은 독일포로에 대한 무차별 발포의 모습과 등가되면서 좀 더 외연을 확장한다. 그것은 이성적 존재이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믿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적 모습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래이디스가 보는 것이 그 희생자들 속에 누워있는 유난히 살아있는 듯한 모습의 모녀라는 것에서 그의 죄의식의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칭 인류를 구원한 영웅이지만 자신의 가족은 구하지 못했다는 것에서 일차적인 정신병의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개인과 전체적 보편성(음... 적당한 단어를 모르겠다T.T)은 둘로 구분된다.
두 번째 래이디스의 상상과 함께 떠오르는 것은 시대적 배경과 연관된 1950년대의 맥카시즘이다. 미국 역사의 추악한 일부인 이 사건은 이 영화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걸까? 먼저 척을 찾기 위해 내려간 절벽의 동굴에서 만나는 레이첼 솔란도가 한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녀는 진실은 거짓으로 덮일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진실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닌 것이다. 이 말은 1차적으로 자신이 테디 윌리암스라고 믿고 있는 이 사람이 실은 윌리암 래이디스였다는 반전에 대한 복선과 내러티브의 긴장감을 조성하려는 것이겠지만, 결국에는 2차대전과 맥카시즘이 모두 전체가 저지른 폭력의 한 종류였다는 것으로 귀결되는 셈이다. 그것은 평화의 행위라는 포장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폭력이었을 뿐이라는 그 진실. 그러므로 개인은 그런 사회가 끊임없이 쏟아내는 폭력의 매질을 견디며 살고 있는 것이며,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정신병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것은 아닌가 새삼 조심스럽게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점에서 제도의 일부였던 형사 윌리암 래이디스가 아내의 우울증을 인지하지 못한 것은 전체(사회)가 개인(국민)의 감정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셔터 아일랜드의 의사들이 래이디스의 정신병의 원인을 그의 개인적 트라우마가 아닌 폭력성으로 진단한 것은 일단은 정확한 진단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제 문제는 하나가 남는다. 그것은 영화 내내 지속되는 뇌수술에 대한 공포다. 테디 윌리암스를 비롯한 모든 환자들은 뇌수술에 대해 공포감을 호소한다. 그 공포감의 근원에는 이성을 잃어버리고 좀비가 된다는 것인데, 이는 스스로 생각을 하거나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병을 극복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래이디스가 스스로 뇌수술을 받기로 결정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그 결정이 정신병이 치유된 래이디스가 스스로 한 결정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영화속에서 의사들은 그의 치유를 부정함으로써 결국 진실마저도 부정되는 셈이 되고 만다. 아마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이것을 노리지 않았을까? 진실은 쉽게 왜곡되고 부정되며 오히려 거짓이 진실이 될수도 있다는 것. 제도는 항상 개인의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장치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이런점에서 선택은 항상 개인의 몫이라는 것일테다. 2차 대전의 아우슈비츠나 맥카시즘의 광풍을 통해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하고 그 대안으로서 폭력을 극복하고 본연의 인간성 회복이라는 목표를 수립하려는 것도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개인이 보편적 인간이 되면 항상 어리석은 선택을 해버리고 만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반성을 통해 인간이 만든 제도는 다시 새로운 권력이 되어 통제불가능한 폭력의 연쇄고리에 얽혀들어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래이디스가 의사들을 착각에 빠지게 하면서 스스로 선택한 뇌수술은 그러한 인간의 이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대항인 셈이다. 치료하는 존재로서의 권위를 가진 제도에 속한 의사들과 정신병원 관계자들(특히 그들의 복장이 군복(제복)이며 나찌를 연상시키고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은 결국 치유에 실패하지 않는가? 이성을 제거한다는 공포에 떨게 한 뇌수술을 받음으로써 래이디스는 스스로 치유되는 셈이며, 그 ‘제도라는 것’을 완전히 거부한 셈이다. 그는 제도속의 괴물이 아닌 오로지 유일하게 인간으로 사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개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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