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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스턴 프라미스>를 시작하면서 곧 하나로 모아질 두 개의 사건을 툭 던져놓는다. 그런데 두개의 사건을 영화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항상 앞, 뒤로 편집을 통한 줄서기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장면을 앞에 놓을 것이냐?하는 선택이 남게 되는데, 이는 감독이 원하는 주제와 미학에 좀 더 접근한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나 사건의 핵심을 이룰 어떤 복선을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결정될 사항일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이스턴 프라미스>를 보았을때, 크로넨버그는 아짐의 이발소에서의 살해장면을 처음으로, 약국에서의 타티아나의 하혈장면을 두 번째로 배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독의 선택이 상당히 흥미로웠고 적절했다고 생각했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그저 매끄러운 영화는 아니다. 결말은 너무 쉽게 예측가능해서 반전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전작인 <폭력의 역사>와 비교해 본다면 어딘가 비어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사실 이런 비교가 정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는 <폭력의 역사>의 속편이 아니기 때문에, 두 영화의 내러티브나 형식은 달라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단지 이 영화들은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스타일이 녹아 있는 작품들인 것이다. 어쩌면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에서는 좀 더 고차원적인 것(?)을 요구해야만 할 것 같은 조바심을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에서 폭력의 연쇄와 구원의 메시지를 읽어보려는 노력은 스릴러적 반전보다 훨씬 재미있는 영화감상의 방법이기도 한 것 같다.


이발사 아짐은 조카를 시켜 한 남자의 목을 베어버리도록 강요한다. 두려워하는 조카를 위협하며 살인을 강요하는 아짐의 뒤에는 키릴이라는 러시아 마피아가 있다. 또한 키릴의 뒤에는 세미온이라는 아버지이자 러시아 마피아의 수장이 존재하고 있다. 아버지 세미온은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커튼 뒤에 정체를 감추고 있는 인물이지만 무자비하고 추악한 범죄집단의 우두머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고 그러므로 일반인들은 가장 암적인 존재의 실체조차도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이 이 위험한 현실의 이면인 것이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몇 몇 장면에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를 의도적으로 떠올리도록 연출하고 있다. 영화 초반의 세미온 가족의 파티장면의 행복한 모습과 그 뒤에서 벌어지는 음모의 교차는 <대부>에서 비토 코르레오네의 딸의 결혼식장면과 마파이들의 검은 거래를 교차편집하는 장면과 겹쳐진다. 그리고 알 파치노가 분했던 마이클 코르레오네의 모습은 세미온의 아들 키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다른 점이라면 마이클이 성공적으로 아버지의 질서를 수호했다면 키릴은 그것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크로넨버그 감독은 혈연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혈연은 너무 쉽게 부패의 씨앗을 그 안에 잉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스턴 프라미스>가 표면적으로 세미온의 아들인 키릴을 내세우면서 그 뒤에서 수령첨정(?)하는 장본인으로 언더커버 경찰인 니콜라이의 존재를 강하게 부각시키며 영화를 종료하는 것은 혈연/가족이라는 부패하기 쉬운 둥지를 벗어나서, 어쨌든 희망을 한번 품어보겠다는 간절함의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담대하게도 코폴라의 대부에 대한 크로넨버그의 대답이기도 할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왜 아짐의 이발소의 살해장면이 타티아나의 하혈보다 더 중요하게 처리되었을까? 한번 생각해 본다. 우선 타티아나는 이 영화에서 희생자로서의 여성이다. 타티아나는 힘없는 자, 민중, 프롤레타리아등으로 지칭되어 질 수도 있다면 그녀는 소재로서의 victim이다. 그러므로 감독은 그보다 좀 더 높은 곳에 그녀가 희생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문제가 있지 않은가에 대한 의문에 좀 더 방점을 찍는다. 그러므로 오히려 크로넨버그는 여자의 육체보다 남자의 육체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인다. 우선 두 번의 살해장면은 모두 칼로 목을 그어 죽이고 있다. 목이 그어진다는 것은 말을 할 수 없게 됨과 동일해진다. 재미없긴 하지만 가장 쉽게 차용되곤 하는 상상계로부터 싱징계로의 진입이 차단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언어와 명명의 행위가 불가능해짐으로써 헤게모니의 질서도 계승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첫 번째 살인의 이유는 세미온의 아들 키릴이 상징계에 안착할 수 없게 만든 언어를 제거한 것이고, 두 번째는 내러티브적으로 복수의 모티브이긴 하지만 역시 상징계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기 힘든 아들의 제거에 다름 아닐 것이다. <대부>의 마이클이 끝까지 살아남고 다른 두 아들이 죽는 것도 비슷하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나아가서 크로넨버그는 정신적인 문제라고 그냥 넘기기 보다는 그 정신의 현현이라할 남자의 육체에 새겨진 어떤 질서의 흔적을 지워보려고 애쓴다. 세상을 지배했던 그 질서. 악습과 폐단이 공존하고,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그 헤게모니의 역사를 지워보려는 노력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다. 영화속에서 러시아 마피아는 자신들의 악행(?)을 모두 문신으로 몸 여기저기에 새겨 넣는다. 니콜라이 역시 언더커버 경찰로서 그들과 똑같이 되기 위해 문신을 새겨 넣은 상태다. 하지만 그 육체는 갈갈이 찢겨나간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사우나에서의 격투장면은 이러한 역사적 헤게모니를 지우는 가장 강력한 이미지이다. 그러한 중요함이 비고 모텐슨같은 스타가 올누드를 각오하고 연기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니콜라이의 육체에 새겨진 그 문신들이 찢겨 나간 후 그는 러시아 마피아의 상징적인 수장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좀 더 새겨야 할 것은 두가지라고 생각된다. 정신의 현현은 새겨질 수 있지만 또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니콜라이의 육체에 새겨진 문신이 거짓의 기록이라는 것. 거짓이 사라진 이후에야 비로소 니콜라이는 키릴을 조종할 수 있는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부정을 통해 새로운 질서는 만들어진다는 것. 크로넨버그 감독은 니콜라이의 몸에서 문신을 제거함으로써 깨끗함을 획득했고, 그럼으로써 세상은 아기가 잘 클 수 있게 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희망을 품어보는 것이다. 타티아나가 낳은 딸은 세미온이 그녀를 강간하면서 태어났고, 키릴은 아기를 죽이라는 명령을 지키지 못한다. 아기와 키릴은 하나였던 셈. 하지만 키릴과 아기는 새로운 부모를 만난다. 키릴은 니콜라이라는 아버지를 만났고, 아기는 안나라는 어머니를 만났다. 그렇다면 좋은 부모가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얘기인 걸까?


혹시 동쪽으로부터의 약속들이라는 제목이 예수의 탄생을 축복한 동방박사 세사람을 가리킨다면 그때 그들이 한 약속은 아마 좋은 세상이었으리라... 그 후예들이 지옥으로 만들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약속한 희망은 보편적으로 유효한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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