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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핀처가 다시 여성주인공과 함께 돌아왔다.
그의 첫 영화 <에이리언 3>에서 여성이 주연으로 등장한 이후 거의 10년만에 다시 여성과 함께 나타난 데이빗 핀처는, 그러나 여성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녀와 함께 귀환한 것은 아니다. 핀처의 관심의 영역은 여전히 남성이고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이며 더나아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이다.
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곳의 상징은 거대한 빌딩숲이다. 그것들은 키높이를 하듯 위로 위로 치솟아 올라가려고 경쟁한다. 파이트 클럽에서 보았듯 순식간에 무너져 내려 사라져 버릴 모래위의 성이지만... 현대인들이 보기에 그것은 권력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낸 생성의 원인은 역사 이후 권력을 장악한 남성들이었으며 아버지라는 이름의 허상덩어리들이었다. 그것은 다시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잉여생산물을 더 만들지 못해 안달하고, 차이라는 계급을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별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지만, 오프닝 시퀀스에서 볼 수 있듯, 빌딩숲에 걸린 이름들처럼 현대인 역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버지들이 만든 자본주의의 거미줄에 걸려있는 셈이다.
바람난 남편과 이혼한 멕은 딸과 함께 살 집으로 그렇게 큰 4층짜리 저택이 필요하지 않아 보이지만 멕은 그걸 사기로 결정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그런 외형을 통해 당당한 여성으로 설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처음 그녀의 이름을 묻는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알트만이라고 남편의 성을 말하면서 자신을 여전히 남편의 자장속에 위치시키는 그녀를 보라.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이 이집에는 마치 여성의 자궁을 연상시키는 패닉 룸이라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름과는 다르게 가장 안정한 장소라는 것이 존재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사 첫날 도둑들이 침입한다. 그들의 목표물은 패닉룸 안에 있다. 괴한의 침입에 당연하게도 가장 안전한 장소로 생각한 패닉룸으로 피신한 멕과 딸은 오히려 그곳에서 가장 큰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가장 안전한 장소가 가장 위험한 장소로 돌변한 셈이다. 또한 패닉룸안에는 그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도 갖춰져 있지 않다. 전화도, 먹을 것도... 엄마는 자궁안에서 역설적이게도 딸을 지켜줄 수가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혼한 엄마는 아빠 없는 딸에게 완벽한 엄마가 될 수 없었을까? 얄궂게도 엄마는 첫날부터 딸을 위험에 빠뜨려 버린셈이고... 더군다나 그녀는 마치 다이하드의 부루스 윌리스처럼 도둑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닉룸이라는 자궁속에서 딸은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으로까지 내몰리고 만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데이빗 핀처 감독의 야심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진다. 이 재능있는 감독이 단지 <엄마액션드라마>를 만들려고는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슬쩍 그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추구되고 있는 그의 세계가 드러난다.
우선 그가 여성으로서의 엄마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도 얘기했다. 또한 그의 관심은 아버지이며, 아버지들이 만든 이 세상이라는 것도 얘기했다.
결국 멕이 엄마판 다이하드를 겪어야 하는 이유는 그녀가 아버지가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부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즉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위를 세워주는 집에 집착한다. 그녀는 지나치게 큰 집을 별 거부감 없이 사들인다. 또한 이혼한 후 아버지없는 딸에게 가장 완벽한 아버지의 역할을 하기로 맘 먹은 듯하다. 그녀는 엄마의 위치에 별로 관심이 없다. 이사 한 후 그녀는 당뇨가 있는 딸에게 피자와 콜라를 먹인다. 음식을 만든다는 것에 관심이 없다. 또한 남편처럼 자신도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한다. 결국 또한명의 아버지인 번햄이 이런 집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는 말처럼, 좋은 집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버지라는 이름에 기름칠을 해주는지... 그래서 멕이 필요이상으로 엄청나게 큰 집을 사게 된 이유는 명확해진다.
이제 아버지들의 모습을 한번 보자. 멕의 남편 알트만 박사는 손한번 써보지 못하고 도둑들에게 난타당한 후 아내와 딸을 구하려는 흉내도 내지 못하고 결박당한다. 또한 도둑중의 한명인 번햄은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돈을 터는 일에 가담한다. 아버지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빈부격차는 그를 결국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것이 돈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던 셈이다. 보라... 아버지들의 모습이란 이런 것이다.
이렇게 볼때 데이빗 핀처는 한심한 아버지라는 이름의 명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멕을 조롱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한 일은 허영의 덩어리위에 세상을 건설한 것 뿐인데... 왜 그녀는 그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시퀀스를 한번 보자. 적들을 다 처치한 후 남편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있고 번햄은 경찰에 붙들려 자신이 애써 훔친 채권다발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신세가 된다. 좋은 아버지에 대한 그의 꿈은 바람에 휘날리는 채권처럼 흩어진다. 그들을 번갈아 보는 멕의 시선은 자신이 그들과 같아지려 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깨닫는 장면이며 감독의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는 씬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멕은 조그만 집을 찾는 것에 만족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질서를 거부하고 극복하는 것이며 참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임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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