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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딩때 부산의 보림극장에서 김응천 감독의 대학괴짜들(아마도?)과 동시상영으로 본 마리아스 러버는 당시엔 내용을 이해하긴 힘들었다. 몇 개의 장면이 조각처럼 기억에 남긴 했지만 무엇보다 강렬했던 건 바로 나스타샤 킨스키였다. 스크린을 뜷고 나올 것만 같은 아름다운 그녀의 눈망울과 입술은 묘한 관능미가 되어 극장을 나선 후에도 여운이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한동안 그녀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인기와 미모를 지속시키지 못했고, 나의 관심도 흥분에서 진정을 넘어 무관심으로 돌아섰지만, 이번에 다시 마리아스 러버를 감상하면서 그때의 그녀의 묘한 관능미가 기시감이 되어 추억 한자락을 살짝 건드려준다. 더불어 그때 이해하지 못했던 상황과 인물들이 새롭게 다가옴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마리아스 러버가 마리아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에 좀 놀랐다. 물론 마리아의 고통이 영화 전반에 정서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긴 하지만, 이 영화는 마리아의 남편인 이반의 이야기이면서 좀 더 광의적으로는 전쟁의 비극, 특히 한 개인이 받게 되는 정신적 상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남자라는 인간의 속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 것 같다.


이반이 갑작스럽게 마리아 앞에서만 성불능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가 시작되면 종전 후 군인들이 상담을 하는 장면이 마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처럼 나온다. 그들은 집에 가고 싶다고 얘기한다. 집. 집에는 뭐가 있길래... 집에 가고 싶은 것일까? 집하면 떠오르는 따뜻한 이미지들이 있다. 그것을 그리워하나보다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반의 집에는 다 늙은 아버지 혼자 있을 뿐이다. 뭐, 따뜻한 환영, 이런 건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반이 생각하는 집은 아버지의 집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떤 집인지 다시 생각해 봐야한다. 이후 이반이 일본 포로수용소에서 악몽 같은 나날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가 마리아와의 사랑에 대한 상상 혹은 꿈꾸기였음을 알게 된다. 그는 또한 임신한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쥐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여성의 순결에 대한 갈망과 비순결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좀 더 멀리 나아가서 이런 순결에 대한 보호와 독점욕구가 남자들이 그 먼 옛날부터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원인중의 하나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반이 지옥에서 살아 돌아 온 후 마리아와의 첫 만남은 그녀가 다른 남자와 육체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을 표출하려는 순간이다. 그가 자기도 모르게 불을 켜는 것은 그것을 저지하고 싶은 무의식적 행동이리라. 그리고 곧바로 이반은 꿈속의 마리아가 현실 속에서 순수하고 순결한 마리아가 아니라 성숙한 육체를 지닌 여인이 되어 있다는 것에 당황한다. 그리고 결혼을 통해 그녀의 순결을 파괴해야 하는 상황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와 더불어 혹시 그녀가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할 수도 있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맞닥뜨리기 힘든 현실은 회피가 최고의 방법. 이반은 기차를 타고 떠나버린다. 결국 마리아의 고통은 남자들이 만들고 상상해 온 신화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또한 이반의 고통 역시 그 신화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것도 가능한 이야기다. 그 공고한 신화는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견고한 성이 되어 남자와 여자를 모두 억압하는 기제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반이 방랑가수 클라렌스를 통해 마리아가 처녀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꿈을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한다든지, 아버지가 아들을 마리아에게 데려다 준다든지 하는 상황이 좀 갑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그 견고한 신화를 부수는데 성공했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마리아스 러버는 서구사회를 지탱해 온 유대신화는 어느 정도 극복해보려는 노력은 한 것 같다. 이것은 감독인 안드레이 콘찰로브스키가 소련출신이라서 가능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반전이나 여성에 대한 관점의 여부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그런데 뭔가 허전한 것은 감독의 야심이 묻어날 이 모든 거대담론을 그저 찔러보고만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는 집에 가고 싶다는 이반의 대사를 다시 한번 반복한다. 마리아가 오매불망 기다리고, 아이가 있는 집. 새로운 가족이 탄생한 그 ‘집’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 속에서 다시 한번 견고한 신화가 재생산 되는 건 아닌지 근심스럽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절반의 성공이며, 결말부분을 성급하게 끝내버린 것 같은 감독의 연출이 아쉽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의 나스타샤 킨스키의 모습으로 기억될 영화이기도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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