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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 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라는 근사한 주제가도 유명하다.
폴 뉴만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콤비로 나왔다는 것은 더 유명하다.
조지 로이 힐 감독의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는
한국의 극장가에 닻을 내리며 <내일을 향해 쏴라>라는
멋진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그게 가장 유명하다.
그런데
또 유명한 게 하나 더 있다.
총을 쏘며 뛰쳐나오는 그 유명한 프리즈 프레임은 영화사에 남을 만하다며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의 400대의 구타의 라스트씬과 어깨동무하고 있다.
이렇게 유명한 게 많은 흥행성공작 <내일을 향해 쏴라>는
존 포드식의 진지한 분위기의 정통 서부극스타일과는 많이 다르다.
미국의 역사를 아우르고 공동체의 선과 질서를 지키는 영웅보다는
오히려 제거의 대상이었던 범죄자들이 주인공이며 그들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코믹한 대사 처리, 낙천적 주인공의 성격은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면서
보는 내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속에 은밀하게 내재되어 있는
20세기를 목전에 둔 미국이라는 나라의 근대화에 대한 코멘터리는
이 영화가 노리고 있는 것이 단지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서부극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가 낡은 기록필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사실에 기초한
실화임을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당대의 신 ‘문물’,
즉 가장 현대적인 매체에 그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의 강조라고도 할 수 있다.
필름(활동사진)으로 시작된 화면은 기차와 자전거를 전시하며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선다.
이렇듯 영화는 시작부터 근대성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고
그런 점에서 나는 <내일을 향해 쏴라>를 가속화되어가는 시대의 변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다고 생각했다.
서부극, 범죄영화, 추적의 서스펜스로 관객을 유혹하지만 부치와 선댄스는 결국 새로운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뒤쳐질 수밖에 없었던 ‘어떤’ 민중들의 모습을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이 은행 털기를 그만두고 기차를 털기로 결정한 것은 꽤 흥미롭다.
이미 은행은 전시대의 범죄자들도 똑같이 털어왔던 공간이다.
하지만 기차는 새로운 시대의 발판이었으며 근대를 나타내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제는 셀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더군다나 기차강탈의 성공 이후 마을의 보안관이 공동의 선을 위해 그들을
잡으러 갈 사람을 모집할 때, 모두들 심드렁한 와중에 자전거 상인이
현대인이라면 있어야 할 것이 자전거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그제서야 흥미를 보인다.
이제 자전거로 대표되는 근대에 의해 공동선 혹은 공동체라는 옛 가치는 그 의미를
상실했다. 시대는 점점 전통적인 인간보다는 자본주의적 인간을 필요로 하며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부치가 자전거에 선댄스의 애인인 에타를 태우고 드라이브 하는 장면은 낭만적인
주제곡과 함께 무척 밝게 연출되어 있다. 그것은 평화롭고 행복한 풍경이다.
하지만 그 장면에는 또한 실패의 이미지, 즉 패배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첫 번째 부치가 에타를 자전거에 태운 것 자체가 이룰 수 없는 희망이다.
정확하게 표현되진 않지만 감독은 그들 세 사람의 관계를 묘하게 표현함으로써
삼각관계의 기운을 내포시키고 있다.
부치가 자전거라는 현대의 상징을 황소라는 전근대적인 상징에 의해 버리게
되고, 웅덩이에 쳐박힌 자전거를 오랫동안 클로우즈 업으로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근대문물이 그들에겐 전혀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내일을 향해 쏴라>는 부치와 선댄스의 좌절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점점 근대화되는 미국에서 그들이 발 붙이고 살 수 없듯 그들은 볼리비아라는
전근대의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황금을 찾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넘어오고
미국인들이 캘리포니아로 이동하듯 또 하나의 꿈에 대한 이동의 경로이지만,
이미 그런 시대는 종말을 고했음을 그들은 아직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감독은 범죄자를 미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머나먼 볼리비아에서 총알받이가 된
그들을 통해 근대로의 변환기에 혼란을 겪었을 미국 소시민들의 초상과 더불어 근대를 맞이하는
불안에 대해 얘기하며 또한 당대 급격한 가치관의 변화까지 다루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볼리비아에 오기 전 잠시 머물렀던 뉴욕에서의 화려한 삶 - 마치 귀족의 모습으로 보이는 -을
스틸사진의 고정된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은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진첩에서나 찾을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부치와 선댄스를 쫓는 주체가 국가의 대리인인 보안관이나 경찰이 아니라,
기차회사의 사장이 고용한 사람들이라는 점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제 자본은 국가의 기능마저 대체하고 있다는 그 불안한 기운의 내포.
하지만 영화속에서 실질적으로 부치와 선댄스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볼리비아의 경찰과 군인으로 국가권력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가 전근대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단순화시킬수도 잇겠지만,
그들이 쫓겨 오게 된 배경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죽음은 결국 변화하는 시대때문임을 동시에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두 번째 기차강탈의 실패와 그들에 대한 추격이 동시에 이뤄진다는 것 또한 같은 의미라고 하겠다.
결국 마지막 장면의 프리즈 프레임은 범죄자로서의 부치와 선댄스를 미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지 못하고 쓰러져간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박제화한 것은 아닐까?
여전히 호주에 있는 황금산을 상상하며 삽을 들고 있을 ‘그’들 말이다.
덧.
<내일을 향해 쏴라>가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시기에 나왔다는 것도 이러한 해석에 기름을 부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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