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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막지하게 총알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인간들이 그것을 피하고 싶어도 피하지 못하도록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해버림으로써

핏방울 가득한 화면을 과시하며

폭력미학이라는 이름을 선사받았던

샘 페킨파 감독에게서

관객이 기대할 만한 것은 아무래도 그만큼의 재미와

그만큼의 폭력과 또 그만큼의 재능으로서의

영화적 완성도일 것이다.


처음 겟어웨이를 보기로 했을 때 나 역시

딱 그만큼의 재미와 이름값을 기대했다.

더군다나 최근에 관심을 가지게 된

스티브 맥퀸이 출연하기도 하거니와

아직까지 이거다 싶을 만큼 인상적인 그의 출연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사실 몇편이나 봤다고...^^)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설레는 기분이 있는 건 사실이다.


겟어웨이는 좀 색다르게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스티브 맥퀸이라는 배우에 대해 좀 다가설 수 있었다는 것 외에도

이 영화가 꽤 이상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는게 사실 더 재미있었다.

분명 겟어웨이는 스타를 앞세운 할리우드의 영화다.

게다가 가장 전통적으로 선호되고 있는 강탈범죄영화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주인공과 그 무리들이 어딘가를 털고 성공적으로 도망치고

그리고 와해되는 과정을 그리는 장르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듯 보이면서도

어디선가부터 어긋나기 시작한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영화였다.

이 낯선 느낌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일단 이 영화가 느와르에 가깝다고 볼 때 알리 맥그로우를 팜므 파탈이라고

부르기엔 솔직히 망설여진다. 오히려 그녀는 구원의 이미지가 더 강한 것 같다.

그렇다면 파멸대신 구원인가?


대부분의 영화에서 당대의 도덕률에 반하는 인물들은 내러티브안에서 어떻게든지

벌을 받는다. 그 인물이 어떤 딜레마에 처해있든 일단 당대의 질서를

옹호하는 것이 상업영화에서는 지켜지는 룰같은 것이다.

대부분의 느와르 영화에서도 항상 범죄는 단죄 받았고

주인공이라 할지라도 범죄자는 어떤 식으로든 처벌을 받게 된다.

그것이 어쨌든 공권력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어

나의 몸과 재산을 보호할만한 자격이 있구나 하고 관객을 안심시킨다는 논리다.

이렇게 무의식속에 나도 몰래 존재하고 있는 규칙들은 겟어웨이를 보는 내내

나의 이성을 지배해 뭔가 이상한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 영화의 가장 이상한점은 감옥에서 출소한 맥코이가 다시 은행을 털면서

50만달러를 독차지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인 듯 보이면서도 은행을 터는 장면이

상당히 대충 찍혀있다는 것이다. 리피피나 오션스 일레븐처럼 과정을 정교하게

보여주거나 아니면 강탈장면을 스피디하고 급박하게 처리한다거나 이런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결국 이 영화는 강탈과 도주의 액션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음을 시인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 제작자는 영화 흥행을 좌우할 이러한

눈요기용 액션시퀀스와 장르를 보고 투자를 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아닌데 싶으면 재빨리 “그럼 뭐지?”를 생각해야 한다.

나는 점점 이 영화가 멜로드라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감옥에서의 출소 장면과 보스와의 만남과 이어지는 은행 강탈 장면을 재빠르게

처리해버리고 난 후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맥코이 부부의 도주와

그를 뒤쫓는 루디의 추격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고 또 가슴 졸이는 서스펜스가 두드러지는 것도 아니다.

루디든 배넌의 부하들이든 쫓는자들이 너무 천하태평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맥코이 부부와 루디가 인질로 잡고 있는 해롤드부부의 모양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는 부부의 관계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왜 감독이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정신없는 현란한 편집과 사운드를 통해

맥코이를 보여주고 있는지 이해가 된다.

그 첫 타이클 시퀀스는 감옥에서 생활하는 맥코이의 모습,

가출소를 결정하기 위한 위원회의 모습과 함께

뜬금없이 사랑을 나누는 맥코이 부부의 모습을 짧은 컷으로 인서트한다.

이는 맥코이가 가출소를 희망하는 이유가 아내 때문 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의 근심은 혹시 아내의 육체를 그가 아닌 누군가가 탐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점에서 그의 가출소가 좌절됐을 때 아내 캐롤에게 배넌에게 가 보라는 말로

첫 시퀀스가 끝난다는 것은 결국 그의 근심과 믿음에 대한 확인과정이

이 영화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는 것을 일치감치 고백한 셈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시퀀스는 감옥에서 막 출소한 맥코이가 아내 캐롤과 함께 찾아가는

공간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원으로 간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이나 일광욕을 하고 있는 부부 혹은 연인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카메라는 자세히 스케치한다. 또한 맥코이의 시점으로 캐롤과 함께 수영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하지만 그것은 곧 이어질 장면의 플래시포워드였는데

이런 편집은  맥코이의 안정에 대한 갈망과 머뭇거림, 두려움을 표현하기에 무척 세련되어 보인다.

그가 상상하는 것은 물에 뛰어듬이었다. 범죄의 때, 나쁨의 때를 벗어버리고 새출발하고 싶었던 것일게다.

어쨌든 씻어내 버리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의 이런 씻어버림에 대한 욕망은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이뤄진다.

 

첫 두개의 시퀀스 이후 현실은 그 소망을 이루기엔 너무 장벽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우선 그는 자신을 빼준 보스에 대한 약속으로 다시 은행을 털어야만 하는 지경이다.

게다가 동료인 루디는 혼자 차지하겠다고 배신을 때린다.

하지만 이게 중요한게 아니다.

알고 봤더니 아내는 배넌과 육체관계를 맺고 자신을 빼냈다는 것이다.

그의 근심은 이제 사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 셈이다.


이제 남은 건 맥코이 부부사이의 신뢰문제이다.

그들은 헤어질 것인가 함께 가족을 만들 것인가.

그들에겐 어쨌든 풍족한 삶을 누릴 만한 돈도 있다.

하지만 관계의 신뢰가 깨어진다면 맥코이의 욕망은 허공에서 흩어지게 된다.

그 돈이 나쁜 돈일수도 있지만 영화속에서는 교묘하게 그 흔적을 지우는 작업에 착수한다.

쉽게 말해 나쁜 놈 위에 더 나쁜 놈 있더라는 방법으로 말이다.

영화는 은행에서 강탈한 돈이 어떤 부정한 방법에 의해 축적되고 있는 돈이라는 설명을 친절하게 해 놓는다.

그리고 50만불은 언론에 의해 75만불이 되면서 마치 다른 것 인양 느껴지게 만든다.

그리고 돈가방을 잊어버리고 찾고를 반복하며 마치 내 것 인양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마지막엔 자신을 멕시코로 데려다준 노인에게 삼만달러를 건네는 모습에서는

마치 자기 지갑에서 자연스럽게 꺼내는 돈 같다.

그렇게 점점 범죄로서의 돈에 대한 의미는 지워진다.


돈의 범죄적 요소를 지우는 대신 맥코이 부부와 의사인 해롤드와 프랜부부의 모습을 대비시키면서 점점 강조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건 여자(아내)의 태도여부이다.

캐롤이 맥코이를 감옥에서 빼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배넌과 섹스를 해야 하는 상황과

인질로 잡혀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루디와 섹스를 해야하는 프랜의 상황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프랜의 행위에 보이는 성적욕구의 표출은 남편의 자살을

몰고 오는 원인이 된다. 그녀 덕분에 분노를 표출하며 배년을 총살하는 캐롤의 행위는 숭고함마저 느끼게 만든다.

물론 여기에는 여성에 대한 남성감독의 이중시선이 존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남편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의 속죄는 스스로 이행해야만 한다는 것.

덕분에 캐롤은 남편의 사랑을, 프랜은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어쨌든 영화는 그들의 성공에 당위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닥 맥코이와 캐롤 맥코이는 스스로 쓰레기임을 인정하고 쓰레기와 함께 폐기장에 버려진다.

그들은 스스로 쓰레기임을 인정하고 난 후 요한이 예수에게 물로 세례를 했듯

그렇게 물로 그것을 씻어냄으로써 다시 태어난다. 그다지 웃지 않던 맥코이 부부의 얼굴에 웃음이 머무는 것은 그때부터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의 악의 씨앗(배넌 무리와 루디)을 처치할 명분도 획득한 셈이다.


맥코이 부부는 이제 깨끗하다.

맥코이는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며 돈에서는 범죄의 냄새가 지웠고,

캐롤은 배넌을 죽임으로써 속죄했다.

또한 그들은 스스로 쓰레기가 됨으로써 스스로를 벌했다. 굳이 공권력의 처벌은 필요없는 셈이다.

왜냐하면 나쁜 놈 위에 더 나쁜놈있듯 깨끗한 놈이 누가 있어 감히 벌을 내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더 이상 그들의 멕시코로의 도주에 장애물은 없는 셈이다.

샘 페킨파 감독은 아무런 갈등상황을 만들지 않고

그들이 맘씨 좋은 노인네와 만나도록 한다. 가볍게 멕시코로 탈출성공.


이제 맥코이 부부는 50만달러로 새로운 자본가가 되었다.

이미 세금까지 기차간의 도둑에 의해 납부했다.

그들의 생명을 구해준 노인에게 협상을 통해 오천달라, 만달러 이러다가 선심쓰듯 3만달러를 준다.

6년치 연봉(?)을 받은 노인은 구세주를 만난 기분으로 그들에게 축복을 내린다.

자본은 이런식으로 프롤레타리아를 감동시키는 건가 보다.

아마 노인은 그 가방속에 있는 50만불중 25만불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좀 오버하자면 마지막 장면에서 자본에 대한 비판마저도 언뜻 생각했다는 것.


한마디로 겟어웨이는 배반의 영화다.

장르를 배반하고 내러티브를 배반하고 할리우드라는 영화공장을 속여먹었다.

더불어 기독교와 공권력까지 놀려먹는다.

이건 나에겐 꽤 통쾌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겟어웨이는 영화를 떠나서

샘 페킨파 감독의 경력의 내리막길의 시작이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할리우드의 이단아는 그 할리우드에 솜씨 좋게 대들었던 댓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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