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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양가감정을 갖게 만드는 나라다. 2차 대전중의 유태인의 비극은 너무 잘 알려져 있고 영화로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한 희생자의 이미지는 보편적인 이스라엘의 이미지로 알려져 왔다. 특히 어린시절에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더욱 미화되었는데, 사막에 물을 대고 농사를 짓는다는 식으로 대단한 나라라고 배웠고, 탈무드도 무조건 읽어야 되는 권장도서였지 않은가.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희생자로서의 이미지는 이스라엘/유태인에 대한 죄는 비단 전쟁으로 인한 독일의 죄를 넘어서서 전 인류의 트라우마가 되어왔다.
그러한 희생자의 이미지속에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잔인함과 중동을 화약고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는 정치적 문제들은 상당부분 은폐되어 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내가 좀 나이가 들어 사안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나서 느꼈던 배반감은 여기서 기인했다. 어린시절 TV에서 봐왔던 영화속의 그들, 학교 선생님이 말하던 사막의 기적에 대한 환상은 어느날 산산조각 났고 그 즈음 개봉된 쉰들러 리스트를 보며 “그런 늬들이 어떻게 그럴수 있냐”는 식으로 몰입도 감동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기억이 있다.
이후 이스라엘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밑도 끝도 없이 조금씩 쌓여갔고, 이스라엘인들은 모두 똘똘 뭉쳐 팔레스타인의 부당한 탄압에 찬동하는 족속들이라고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참 단순하게도 이런 일면적인 생각이 한동안 지속되었는데, 어느 잡지에서 읽은 “우리도 부당한 것은 알지만 이젠 지쳤다. 어쩌란 말이냐”라는 어느 이스라엘인의 말은 이런 생각을 더욱 굳게 만느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일면적인 사고가 얼마나 어리석은가하는 것을 깨닳은 것은 좀 더 시간이 지나서였다. 사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는 직접적으로 피부로 느껴지거나 나와 관계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이슈가 있을때만 감정적 동요를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그 문제에 대한 고민이나 해결방법은 굳이 내가 시간 쪼개서 할 필요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당장 내앞에 닥친 수많은 고민거리도 해결하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는데 말이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 그만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이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남성중심의 아랍사회이므로 여성은 무조건 집에만 있고 사회생활은 엄두도 못내는 나라라는 이상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나의 사고의 틀을 확 깨워주는 일이 있었다. 2003년쯤인가 서울여성영화제에서 본 파흐미네 밀라니 감독의 이란영화 <두 여인>을 보면서 이런 나의 생각이 얼마나 형편없고 편견에 가득차 있는지 알게 되었다.물론 영화속에서 여성은 학대받고 있지만 이란이 여성의 사회진출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그런 폐쇄적이기만 한 나라는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내게는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생각해보게 하는 깨닮음이 되는 영화이기도 했다.
말이 길어졌는데, 에이탄 폭스 감독의 <버블>을 보면서 다시 한번 <두 여인>을 떠올렸다.
버블은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나름 좌파 청년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의 분리정책에 반대하는 집단에 속해있고, 나름대로 운동으로 실천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영화자체가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파고드는 건 아니다. 주인공들의 일상적 배경으로 깔아놓고 있다. 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환경인 것이다. 하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다분히 정치적인 문제로 연결이 되고, 에이탄 폭스 감독의 입장에서는 모국의 미묘한 문제를 무겁지 않은 일상적인 방식으로 주인공들의 비극을 통해 물어보고 있는 셈이다. 과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리정책이 이스라엘인들을 더욱 안전하게 만들고 있는 것인가? 왜 하나의 민족 혹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살지 못하는가에 대해 질문하고 싶어 한 것 같다. 이제 갈때까지 가버린 감정의 골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의 나날이 계속되지 않겠는가....
버블은 팔레스타린의 검문소의 모습과 에피소드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 살벌한 풍경과 적대감으로 가득한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의 모습. 그리고 그런 상황을 답답해하는 노암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이 영화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티브를 빌려오고 있는데, 첫장면에서 첫눈에 노암에게 반하는 팔레스타인 아쉬라프가 그를 찾아오는 것으로 본격적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들은 곧 사랑에 빠지는데... 그렇다. 영화 버블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퀴어버전으로 살짝 변형시켜 놓는다.
노암은 이스라엘의 점령정책에 대항하는 좌파 젊은이들로 구성된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는 룸메이트 룰루와 옐리와 함께 아쉬라프를 유태인 이름인 시미로 바꿔 같이 살게 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허가없이 이스라엘에 거주가 불가능한 모양이다. 아쉬라프는 불법체류자의 모양새로 사랑하는 노암의 곁에 머물게 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불가능했듯이, 노암과 아쉬라프의 사랑도 정치적 문제로 인해 결국 비극적 종말로 향한다. 아쉬라프의 처남이 저지른 폭탄테러와 그로 인한 이스라엘의 보복으로 인해 여동생이 결혼식 다음날 죽어버린다. 이런 돌고 도는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아쉬라프는 폭탄을 몸에 두르고 노암을 껴안은 채 스위치를 눌러 버리고 마는 것이다.
영화 전체적으로는 아쉬라프가 폭탄을 몸에 두르기로 한 고뇌나 고민이 잘 드러나지 않아 갑작스럽다는 느낌이 강해서 아쉽지만
아쉬라프가 자살테러를 감행해야 하는 것도
노암이 죽어야 하는 것도
팔레스타인의 자살폭탄의 피해자가 그들을 옹호했던 옐리였던 것도
모두 어쩔수 없는 이스라엘이 안고 있는 현대비극인 것이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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