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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하지만 가슴 한쪽이 묵직해지는 영화를 보았다. 그런데 이 영화의 감독이 구로자와 기요시다. 기요시는 공포영화에서 좋은 작품을 많이 발표했는데, 드라마 장르도 잘 만드는구나 생각했다. 그의 영화는 공포영화이든 드라마든 공통적으로 느껴지는건 건조함이다. 진짜 나뭇잎이 바짝 말라버린 것 같은 건조함이 프레임을 뚫고 삐져나오는 것 같다. 그리고 그걸 밟았을 때의 바스락거림과 바짝 마른 낙엽조각들처럼 그렇게 인물들의 삶은 영화속에서 부서져 내리는 것이다.
<도쿄 소나타>는 공포영화가 아니어서 인지 그 건조함이 좀 더 내밀하게 전달되는 느낌이다. 장르가 드라마라서인가 그건 오히려 스산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건조함과 스산함. 뜻이야 어떻든 영화속 4명의 가족과 그 주변인들의 삶은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각박한 현실속에 박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움직이지 못하는 박제의 답답함. 그것을 벗어나보려는 몸부림이 아버지 류헤이, 어머니 메구미, 큰아들 다카시, 막내아들 켄지로 이루어진 이 가족이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당면하고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기요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러한 굴레로부터의 벗어남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먼저 이러한 박제화된 굴레를 만들어낸 것은 무엇일까?
영화는 첫장면에서 살짝 열린 문틈으로 비가 들이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살짝 열린 문틈은 견고하게 박제된 집이라는 공간에 비집고 들어선 틈이다. 어머니가 문을 닫고 빗물을 깨끗하게 닦아내지만 한번 벌어진 틈을 통해 공기는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들어온다.
영화는 먼저 박제화된 집을 만들어낸 주체, 즉 박제화된 현대사회를 만들어낸 주체로서의 아버지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이 아버지는 그저 평범할 뿐이다. 회사의 부장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그저 일본의 소시민일 뿐이다. 하지만 감독은 이러한 일본의 소시민으로 아버지들이 역사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와 형식과 굴레를 만들어온 존재라고 얘기한다. 특히 현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월급이 온라인 통장이 아닌 월급봉투를 통해 전달되는 장면을 굳이 제시하는 것은 이 영화가 아버지라는 상을 먼 과거로 소급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한 월급봉투의 교환을 통해 가족이 유지되고 있고, 나아가 국가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성된 아버지의 법이 현대 일본의 모습과 정신을 만들어냈다고 기요시 감독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더군다나 <도쿄 소나타>에서 아버지 류헤이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런 상태라면 아버지의 실직은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권위의 추락으로 이어진다. 권위라는 것이야말로 견고한 박제를 만들어 낸 원인이며, 틈을 생성하지 않아 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인 것이다. 더 심하게는 아버지 류헤이의 존재가치는 없어지는 셈이며, 친구의 자살이 보여주듯 남아있는 선택은 자살밖에 없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그 견고함에 생긴 틈(열린 창문)을 보여주듯 더 절실하게 변화를 갈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감독의 의도일 것이다.
좀 더 나아가서 일방적인 권위라는 것이 얼마나 나쁜것이냐하면 아내는 가족의 끈을 잇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자신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지경이 되며, 아들들은 꿈을 꾸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오로지 아버지의 꿈/생각/정신만이 중요해져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들 마저도 그 견고함에 질식해버리고 마는 것이 현대라는 괴물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다시한번 틈은 중요해진다. 아내는 그 틈(빗물이 들이쳤던 거실문)을 통해 침입한 강도를 만나 하룻밤을 보내며 본연으로서의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큰 아들은 희망없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떠나 좀 더 보편적인 인류애를 성취하고자 하는 꿈을 꾼다. 그러나 큰 아들은 전쟁이라는 아버지의 법을 통해 그걸 성취하려 함으로써 예정된 실패를 하게 된다. 그러나 어쨌든 일본이라는 박제를 떠나 다른 세상을 경험해보려 한다는 점에서 자신을 찾을 수 가능성을 내포한다. 피아노 천재인 둘째아들은 권위로 대항하는 아버지를 누르고 음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함으로써 자신을 찾아간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버지는 실직이라는 상징적 권위의 박탈을 통해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새로운 권위(좋은 의미에서의)를 만들어 내야할 의무가 있다. 그가 청소일을 하며 획득한 두툼한 봉투- 어쩌면 누군가의 월급봉투일지도 모르는-를 포기함으로써, 나아가 상징적 죽음을 당하는 두 번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모든 가족이 격렬했던 하룻밤을 보내고 그 모습 그대로 식탁에 앉아 아무일 없이 밥을 먹는 장면은 기요시 감독이 가족의 해체를 통해 현대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변화를 통해 현대를 극복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막내아들의 피아노 연주. 그 부드러운 선율속에서 모든 견고함은 녹아내린다. 아버지가 녹아내린다. 뻣뻣했던 심사위원과 관객들이 녹아내린다. 이렇게 견고함이 부서지지 않고 녹아내릴 때 인간은 꿈을 꾸며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고 현대는 좀 더 나은 세상이 되리라는 희망을 꿈꿔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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