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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아직까지는 문숙이다. 그렇다. 바로 <허스토리>의 할머니이자 <그것만이 내세상>에서는 돈 많은 할머니로 열연했던 바로 그 문숙이다. 조금 더 보태자면 할머니 문숙도 여전히 지지하고 있지만 실은 젊은날의 문숙을 좋아한다. 그녀가 보여준 젊은 생명력을 좋아한다고 해야 할까? 땀이 흠뻑 젖은 채 온 도시를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달랑 4편의 영화만 던져 놓고 홀연히 사라진 여배우 문숙에게 매력을 느낀다.


명랑소녀 우산 펼치기 신공

 

그러다 보니 이만희 감독과 함께 한 <태양 닮은 소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역시 좋더라. 역시 문숙은 매력적이더라. 하지만 이번에는 얼마전에 작고한 신성일의 연기가 눈에 밟혔다. 피곤하고 삶에 지친 아저씨의 모습이 정말 사실적으로 보인다. 옆집 소녀를 지켜주면서 끝내주게 싸움을 잘하고, 악의 무리까지 소탕해버리는 이웃 아저씨가 나오는 21세기의 대박 영화의 주인공 아저씨의 모습이 참 이질적인 것이었구나 하게 된다. 70년대의 아저씨는 소녀에게 48000원도 제대로 마련해주지 못하고 씁쓸한 썩소만 짓다가 죽고 만다. 그러나 소녀는 아저씨에 의해 구원받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건 처음부터 그녀의 목적이 아니었다. 소녀는 혼자 스스로 여전히 웃으며 뛰고 또 뛸 뿐이다.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가방을 둘러맨 그 어깨.. 아니 그 머리가 아름다워~


<태양 닮은 소녀>를 보고 있으면 이만희 감독이 꽤 외로웠고 사랑에 고달팠던가 알 것 같다. 40대 중반이라면 많은 나이가 아닐진데, 70년대의 아저씨들은 많이 늙어 보인다. 아마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헤쳐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개발도상국의 돈도 권력도 가지지 못한 아저씨들. 그렇게 이 영화는 일종의 기시감을 만든다. 이만희 감독의 1968년 작품 <휴일>이 검열로 인해 존재가 사라지고 그 흔적조차 모를 때, 감독은 그 후일담을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



 

더불어 젊음에 대한 찬가가 대단한 영화이기도 하다. 소녀는 젊기 때문에 뛸 수 있고, 아저씨가 돈을 가져오지 못해도 실망하지 않고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멋진 한방을 날리기도 한다.


밑에 있는 찰진 대사를 낭창낭창 하게 읊고 있는 문숙

 

어른들은 왜 우리 애들을 나쁘게만 보는 거죠. 왜 어른들은 우리들이 자기를 닮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거죠? 그것은 보지 말아아. 그것은 듣지 말아라. 그것은 생각하지 마라. 그것은 갖지 마라. 그곳은 가지 마라. 하지 말라는 거 투성이예요. 웅덩이의 썩은 물같이. 죽은 새같이 조용히 조용히만 하라는 거예요. 싫어요. 어른들이 애들 속을 썩인단 말예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만희 감독이 좋다. 그리고 그 대사를 천연덕스럽게 할 수 있는 배우는 젊은날의 문숙 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후 <삼각의 함정><삼포 가는 길>에서도 함께 했지만 그 어느 영화에서도 문숙의 매력을 이렇게 살려 놓은 작품은 없다. 아마 <태양 닮은 소녀>의 소녀는 이만희 감독이 그리던 가장 이상적인 소녀의 모습이 아니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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