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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쉘로우 그레이브>와 <트레인스포팅>으로 총명 가득한 젊은 영국영화의 기수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대니 보일도 어~언 중견감독의 위치에서 안정적으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채워가고 있다. 사실 2000년 이후에 발표한 영화들은 초기작같은 임팩트는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일정 정도의 성취와 재미는 안겨준다. 그다지 끌리지 않았던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건너뛰었기 때문에 <127 시간>은 오랜만에 만나는 보일의 영화였다. 나름 재미있었고 아론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긍정적 기운도 좋았다. 한명의 인물로 90여분을 끌고 가는 연출의 힘도 느껴졌고 말이다.
영화는 뜬금없는 분할화면으로 시작한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일군의 사람들을 세 개로 분할된 화면속에서 한꺼번에 보고 있는 느낌은 개미들이 정신없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느낌과 비슷했다. 이 수수께끼같은 장면은 엔딩에서 다시 반복된다. 본편과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통해 대니 보일 감독은 움직이는 사람의 이미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구조적으로도 엄청난 인파와 빠른 속도로 경쟁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난 후, 세 사람이 수영을 하며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사막에 고립된 아론 랠스톤이라는 사람의 사투를 보게 되며, 그리고 다시 인파로 영화는 끝난다.
그러니 이 뜬금없는 오프닝의 장면들은 뭘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란 관계속에서, 보이지 않는 질서가 만들어 놓은 동선을 따라, ‘빠르게 더 빠르게’를 외치며 살고 있는 존재라는 것인가? 이러한 관계와 부대낌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존재가 증명된다는 듯이. 하지만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의 개인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착각에 불과할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도 하다. 익스트림 롱쇼트로 보여지는 화면에서, 그것도 세 개로 분할되어 있는 화면속에서 등장하는 사람들 개개인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누가 누구인지 알수가 없다. 단지 거대한 익명성의 바다에서 움직이는 개미처럼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라는 시공간속에서가 아니라 어쩌면 홀로 있을 때에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론이 갖혀 있는 절벽과 절벽사이의 틈. 즉 시공간이 무의미해지는 그 틈에서야 비로소 아론은 자기 자신을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가 등산의 베테랑이었던 건 다행이었다. 생존과 직결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나같은 인간이 갇혔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수도 있었겠지. 더군다나 아론이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도 다행이었다. 그렇지 못한 나는 지레 삶을 포기했을 수도 있었겠지.
아마 대니 보일 감독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이런 삶에 대한 긍정성,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었을 것이다. 살아야 하겠다는 생존본능이야말로 인간의 존재증명을 위한 첫 번째 과제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론이 팔을 잘라내고 다시 사막으로 나왔을 때, 그 모든 구조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는 몇 사람의 도움을 통해 살아난다. 그리고 영화는 아론이 여전히 등산을 하고 있고, 트래킹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그가 사건 이후로도 자신의 삶을 훌륭하게 꾸려나가고 있다는 걸 강조한다. 그리고 다시 오프닝 장면이 반복된다. 그러나 그 의미는 360도 달라져 버린다. 똑같은 장면임에도 말이다. 마치 군중속의 개미처럼 보여지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해 회의해야만 할 것 같은 사람들이 이제는 그러한 익명성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축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부대끼며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소중한 삶의 모습들인가 하는 의미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어쩌면 삶의 긍정성은 밝은 사회의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일과 여가를 통해 사회와 개인을 융합하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팔 하나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라는 무한긍정의 세계관이야말로 이 영화가 보편성을 획득한 이유일 것이다. 지금 발 딛고 서있는 이 부대낌속에서 나의 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라. 이것이 대니 보일 감독의 <127시간>을 보면서 내가 내린 결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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