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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길종 감독의 유작 <병태와 영자>를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조금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완성도 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 전작인 <바보들의 행진>의 영광을 생각해도 그랬다. 하지만 그저 그런 영화라고 단순하게 말할 성질의 영화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탄탄해 보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확실히 힘은 빠져 보였다. 어쩌면 하길종 감독은 처음부터 쉽고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를 구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바보들의 행진>의 속편이어서 조금 아쉽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태와 영자>는 당대 유신 체제에서 숨 막혀 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아닌 척 하면서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바보들의 행진>으로부터 3년후. 병태(손정환)는 병장말년이다. 곧 제대를 앞두고 있다. 영자(이영옥)가 면회를 온다. 영자가 그리웠던 병태는 영자를 붙잡지는 못한다. 병태가 제대하고 영자는 졸업한다. 영자는 곧 은행원이 된다. 그리고 의사 주혁(한진희)과 결혼할 예정이다. 병태는 복학한다. 그리고 영자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한다. 영자도 사실은 병태를 사랑한다. 그래서 주혁을 버리고 병태를 선택하기로 한다. 병태의 집에 인사를 하기까지 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영자는 주혁과의 약혼식을 진행하기로 한다. 병태는 의기소침해지지만, 곧 씩씩하게 주혁에게 내기를 건다. 병태는 열심히 뛰어간다. 그리고 영자를 데리고 나온다. 병태는 젊음 하나만으로 모든 불가능을 극복한다. 병태와 영자는 남녀쌍둥이를 낳는다.

 

후반부 에피소드인 의사 주혁과의 대결시퀀스는 이 영화의 백미라 할 만했다. 의사가 자가용을 몰고 가는 길은 국군의 날 행사 때문에 막힌다. 그것은 주혁이 바라보는 한국이라는 사회다. 하지만 병태가 뛰어가는 공간은 허물어지고 있거나, 아니면 막 뭔가를 건설하려고 시작하는 공간이다. 그렇게 하길종 감독은 병태에게 희망을 부여하려고 애쓰면서도 자신이 세상에 대해 여전히 발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낡은 전근대는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들어섰으면 하는 바램 같은 거 말이다. 이 한 시퀀스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그러나 아쉽지만 <병태와 영자> <바보들의 행진> 같은 걸작은 되지 못했다. 시대의 아픔과 그 속에서 아파하는 젊음을 깊이 있게 녹여내지는 못한 것 같다. 하지만 하길종 다운 패기 있는 장면들이 있어서 반가운 영화이기도 하다. 흥행을 위해 당시에 유행했던 하이틴 영화의 냄새도 피어나고, 영화 졸업의 마지막 장면도 차용한다. 이전 작품인 <속 별들의 고향>에서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욕망>의 장면을 차용하기도 했다.

 

사실은 이 영화는 병태가 영자를 약혼식장에서 데리고 나오면서 끝났다면 더 깔끔한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이후의 에피소드인 병태와 영자가 쌍둥이를 출산하는 장면은 정말 군더더기 사족에 불과해 보였다. 또 하나의 아쉬움이라면 영자를 연기한 이영옥은 <바보들의 행진>에서 겨우 4년이 지났을 뿐인데 얼굴이 산전수전 다 겪은 표정으로 변해서 좀 아쉬웠다. 여자에게 4년이 그렇게 긴 시간인가? <바보들의 행진>의 그 깜찍하고 귀여운 영자의 모습이 사라지고 지나치게 성숙해버린 여자의 얼굴이 보여서 어색했다.


안보고 싶어도 뭔가 단점이 한 개 두개 눈에 밟히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태와 영자>에는 뭔가 분출하고 싶지만 억눌려 있는 광기가 시나브로 느껴진다. 그것은 그야말로 하길종 감독 그 자신의 것이고, 재능이다. 아니 울분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나으려나


개봉 : 1979년 2월 9일 스카라극장

감독 : 하길종

출연 : 이영옥, 손정환, 한진희, 한은진, 백일섭, 박남옥, 김희라, 최남현, 김신재, 이승현, 조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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