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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원작소설 은교를 무척 인상깊게 읽었던 터라 정지우 감독이 <은교>를 만든다고 했을 때 기대가 컸다. <모던보이>가 실망스러웠지만 <해피엔드> <사랑니>만으로도 정지우 감독에 대한 신뢰가 여전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드디어 극장에서 <은교>를 보면서 이적요(박해일), 은교(김고은), 서지우(김무열)가 만들어가는 스토리와 예쁜 화면을 주목하면서 영화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주인공 세사람 사이의 드라마에 끼어들어 감정의 공란을 채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랬다. 소설 은교가 영화 <은교>로 바뀌면서 축약된 부분을 내가 채워가며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나는 결국 이 영화에 온전하게 몰입하는데 실패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좀 더 복합적으로 세사람의 관계와 심리변화에 집중했던 소설과는 달리 정지우 감독은 늙음이라는 것에 좀 더 포인트를 두고 각색을 한 걸로 보인다. 소설이 깨알같은 문자로 제공하는 방대한 인물들의 심리묘사를 영화에 그대로 담을 수는 없다. 대신 영화는 공감각적인 영상으로 그걸 풀어내고 관객은 적극적으로 해석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감독이 소설의 모든 형식을 지우고 이적요 시인과 그가 이상화하는 젊음을 체현하는 은교로 영화를 중심에 두고자 하면서도 소설이 가지고 있는 갈등양식 특히 서지우와의 문제를 동시에 껴안으려다 보니 약간의 삐걱거림이 있었던 건 아닌가 한다. 서지우의 비중을 좀 더 단순화시켰다면 이 영화는 감독의 의도를 더 적절하게 표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재능 없는 소설가로서의 서지우보다는 은교와 정사하는 젊은 육체 서지우만 남겨놓았다면 이적요가 느끼는 패배감이 더 잘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더라는 것이다.

 

영화속의 멋진 대사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이건 이상속에서나 있는 말임을 영화는 보여준다. 이적요와 은교의 정사는 환상에서만 가능하고, 현실에서 은교는 서지우와 정사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논란거리였던 은교의 체모노출은 이적요의 절망감을 그대로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방식이다. 그것은 이적요가 가질 수 없는 단 한가지였다. 이런 장면은 소설이 결코 제공할 수 없는 영화만이 줄 수 있는 임팩트다. (일단 영화를 위해 대담한 연기를 하기로 결심한 김고은에 박수를...^^)

 

그래서나는 정지우 감독이 베스트셀러 원작소설이라는 압박감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해서 아쉽다. 소설과는 방향을 달리가기로 했으면 좀 더 과감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적요의 늙음을 강조하기 위해 서지우는 좀 더 단순해져야 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서지우의 재능없음이 소설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별다른 효과를 드러내지도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서지우가 소설가로서의 재능이 없는 것과 은교를 탐하는 이적요의 실패의 연결고리는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는다. <은교>는 분명 아름다운 영상이 있는 영화다. 인물들의 연결고리가 헐겁게 느껴진다고는 하나 분명 드라마는 강하다. 하지만 <은교>는 중심이 견고하지 못한 영화다. 그래서 안타깝다. 아깝다. <모던보이>이후 정지우 감독이 여전히 옛날 <해피엔드> <사랑니>의 강렬함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헤메고 있는 듯도 하여 더더욱 아쉬운 영화다.


개봉 : 2012년 4월 25일

감독 : 정지우

출연 : 박해일, 김고은, 김무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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