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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태 감독의 <나녀>를 보았다. 나에게 박호태 감독은 80년대 내내 <빨간앵두>시리즈 덕분으로 에로영화 감독으로만 인식되었는데, 70년대 영화를 몇 편 찾아보면서 그가 생각보다는 여러 장르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영화사에 족적을 남길 만한 완성도 있는 작품은 드문 편이지만, 78년에 개봉된 <나는 77번 아가씨>는 호스티스물의 인기에 힘입어 크게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나녀>는 이듬해인 1979년에 개봉된 작품이다. 지금까지 봤던 박호태 감독의 작품중에서는 가장 괜찮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호(남궁원)과 연하(윤연경)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후, 시골의 분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삶을 바치고 있다. 그들은 아들과 딸을 두고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어느날 광호는 분교장 모임 참석차 서울로 출장을 가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6.25전쟁이 일어나고 만다. 마을 사람들은 피난을 서두르지만, 연하는 남편 광호를 기다리다 뒤늦게 피난길에 오른다. 하지만 식량을 구하기 위해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데, 마을은 이미 북한군의 소굴이 되어 있다. 연하는 자식을 볼모로 삼는 북한군에게 자신의 몸을 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하지만 결국 아들은 지키지도 못하고 죽고 만다. 괴로운 나날이 계속되다 다시 국군이 마을로 들어오게 되고, 연하는 북한군에게 협조한 혐의로 잡히지만, 마을사람들의 탄원으로 곧 풀려날 예정이다. 이때 국군에 입대했던 남편 광호가 돌아온다. 광호는 모든 것을 전쟁 탓으로 돌리지만, 연하는 죄책감에 자살하고 만다. 안타까움에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광호 역시 아내의 무덤가에서 딸이 수류탄을 가지고 노는 걸 말리다 그만 죽고 만다. 딸 역시 벼랑에 매달린 채 울며 아빠를 찾는다.

 

<나녀>는 전쟁으로 고통 받는 한 여인의 모습을 통해 전쟁의 비인간성과 비극을 고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초반부와 후반부가 약간 톤이 다르다. 초반부는 연하와 광호라는 인물을 적절하게 성격화한 후, 광호가 없는 피난길에서 연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꽤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안정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연하가 마을로 되돌아오고 난 이후의 상황은 인과보다는 뭔가 말초적인 자극을 추구하는 형태로 바뀐다. 카메라는 연하의 나신을 훑어 내리면서 흥행을 위한 눈요깃감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변한다. 연하 역시 부모의 반대로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결혼한 강단 있는 여성으로 보였는데, 착취적으로만 화면에 등장하면서 긴장을 이어가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쉽다.


하지만 영화는 좀 더 나가기로 한 듯, 마지막 시퀀스가 꽤 파격적이다. 연하의 비극을 통해 어느 정도 전쟁의 비극은 전달되었다고 보는데, 박호태 감독은 어설픈 화해를 선택하지 않기로 한 것 같다. 전쟁의 파편이라 할 아무데나 나뒹구는 불발판으로 인해 광호와 딸까지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결말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영화가 보여주던 전형적 결말짓기를 살짝 비켜나간 이 장면 덕분에 이 영화는 일종의 반전을 제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피에쓰

이 영화의 포스터는 전형적인 낚시성 포스터다. 이 포스터를 보고 누가 전쟁으로 인한 비극을 다룬 영화라고 생각할런지...


개봉 : 1979년 3월 10일 서울극장

감독 : 박호태

출연 : 윤연경, 남궁원, 김희라, 김기종, 성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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