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만희 감독의 <검은 머리>는 캐릭터가 돋보인다. 문정숙이 연기한 비련의 여인도 60년대 당시의 신파적 여인상에서 벗어나 있다. 장동휘가 연기하는 보스 역시 잔혹함 대신 로맨티스트의 외피를 하고 있다. 경상도 사나이 운전수인 이대엽은 여자의 과거를 묻지 않는 무척 쿨한 사나이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의 과거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당시의 한국영화들이 여자의 과거와 순결에 매달릴 때 이대엽이 연기한 운전수는 그런 건 시시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이만희 감독은 사랑하면 다 필요 없고 그저 사랑만 하면 되는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만희 감독 정말 멋지다니깐.

 

여타의 갱스터 영화와는 달리 <검은 머리>에서는 악의 씨앗을 퍼트린 주체로 등장하는 장동휘는 자신이 만든 죄의 씨앗을 스스로 거둬 들이는 순교를 택하기로 한다. 어쩌면 세상의 죄를 대신했다는 예수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낸 캐릭터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니 장동휘는 그의 휘하에 충실한 부하/제자를 거느리고 있기도 하다

 

또한 <검은 머리>에는 뜬금없는 대사의 위력도 돋보였다, 영화 자체가 신파적 장치들을 피하고 있기 때문인지 구구절절 읊조리는 대사도 유치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게다가 뛰어난 미장센이 만들어내는 멋진 장면들도 잊기 힘들다. 특히 마약에 중독된 남편이 방바닥에 뒹굴고 있고,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친 문정숙이 찬장에서 찬밥을 꺼내 먹는 장면의 구도는 그녀가 처한 고단한 현실을 대사 한마디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정말 뛰어난 명장면이다.  


이만희 감독의 <검은 머리>는 지독한 마초들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지독한 로맨티스트인 남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여인을 둘러싼 삼각관계, 여인의 행복을 빌어주는 참 사나이로서의 마초는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들에서 보던 우수에 찬 갱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 이만희 감독이 실제로 그런 사람이었을 것 같다. 마초 로맨티스트. 사랑에 목숨 거는 남자. 어쨌거나 <검은 머리>는 또한 배우 문정숙의 영화다. 연기가 너무 너무 좋다


개봉 : 1964년 7월 31일 국도극장

감독 : 이만희

출연 : 문정숙, 장동휘, 이대엽, 김운하, 정애란, 최성호, 장혁, 독고성, 추석양, 이해룡, 강문, 최성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