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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은 정진우 감독에게 창조력이 불꽃을 틔운 해였나 보다. <초우>도 좋은 영화였지만 <하숙생>도 근사하다. 흑백화면이 주는 묘한 긴장감도 좋았고, 박인석(신성일)이 기거하는 하숙집의 군상들의 모습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게다가 조연급 인물들도 스토리와 자연스럽게 맞물려 들어가는 구성도 좋다.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옛여인의 옆집에 기거하면서 그녀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한다는 이야기도 왠지 모던해 보인다.


박인석은 화상을 입자 자신을 떠나 부잣집 남자와 결혼한 재숙(김지미)에게 복수하기 위해 옆집에서 하숙을 하며 밤마다 아코디언으로 같은 음악을 연주한다. 그 음악은 인석과 재숙이 연애할 때 즐겨 연주하던 곡으로, 재숙은 이 음악을 들으며 괴로워 한다. 하숙집 주인(김희갑)은 잃어버린 아들이 있다. 하숙집엔 남편을 죽인 범인을 찾아다니는 여자(전계현)와 그들을 소재로 글을 쓰고 있는 소설가(오현경)가 있다. 재숙은 인석의 아코디언 소리에 점점 신경이 쇠약해져 결국 정신병에 걸려버린다. 그리고 아내는 결국 살인범을 붙잡는데 성공하지만, 그는 하숙집 주인의 잃어버린 아들이었다.

 

마지막 시퀀스가 참 멋지다. 정신병원에 갇힌 재숙을 보며 사랑의 증표였던 목걸이를 남겨놓고 차갑게 돌아서던 인석은 범인을 잡은 하숙집의 여자에게 하숙집 주인의 아들을 용서하라고 말한다. 그러자 여자는 자신의 애인을 정신병자로 만들어 버린 잔인함을 보인 그의 이중성을 경멸하며 가버린다.

 

가수 최희준이 부른 주제가는 크게 히트했다. 가사가 담긴 노래는 감미로우나 아코디언에서 흘러나오는 연주곡은 살의의 향기였던 것. 스타일과 스토리를 무척 모던하게 느낀 것이 사실이지만, 역시 재숙이 보여주는 행동은 캐릭터와 맞지 않아 보였다. 반반한 얼굴이 있으니 미스코리아가 되어 가난을 벗어나겠다는 야망을 결국 이뤄내고, 자신을 구하다 화상까지 입은 애인을 버려두고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할 정도의 담력을 가진 여인이 단지 음악소리에 스스로 무너진다는 설정은 어딘가 어색하다.

 

어떻게 보면 소처럼 울고 있다고 표현하며 자신의 처지만 동정할 뿐 여자의 꿈은 사소하게 생각하는 인석의 모습에서 당시의 이기적인 남자의 내면을 까발리고 있는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짐짓 그런 남자의 편을 들어주는 척하지만 인석이 결국 범인을 잡은 하숙집 여자의 경멸을 받으며 쓸쓸히 떠나는 것과 정신병원으로 재숙을 찾아온 남편과 딸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아낼 때 정진우 감독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는 분명해 보인다.


개봉 : 1966년 6월 30일 아카데미극장

감독 : 정진우

출연 : 신성일, 김지미, 전계현, 오현경, 최남현, 김희갑, 전양자, 김정옥, 윤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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