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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의 소녀 가장 리의 생존을 위한 고군분투를 다루고 있는 데보라 그래닉 감독의 <윈터스 본>은 그야말로 꽉 짜여진 스릴러 영화다. 이제 성인의 문턱에 다다른 소녀가 맞이하는 현실이라는 세계는 잔혹하기 그지없다. 감독은 리가 현실이 따뜻한 동화속 공간이 아님을 익히 알고 있는 성숙한 소녀로 설정한다. 그러므로 리가 아버지를 찾으면서 실제로 대면하는 세상의 차가움은 잔혹함의 무게를 더욱 상승시킨다.

 


어떻게 보면 가족을 지키기 위한 한 소녀의 투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그녀가 지키려는 가족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아버지를 찾는 행위가 가족의 빈틈을 메우려는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라는 존재의 부재를 정당화하려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하고 또 그것이 이 영화의 핵심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거다. 스토리는 표면적으로 아버지가 자신의 보석금을 만들기 위해 가족 모르게 집을 저당 잡혔다는 것이고, 아버지의 실종으로 말미암아 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지난 2주간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동안에도 리는 엄마와 동생들을 보살피며 나름 잘 살아왔다 것이다. , 아버지의 행방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 그걸로 봐서는 리가 아버지에게 그다지 애정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아버지의 직업으로 봤을 때 가족에게 피해만 주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 엄마의 병은 그로인해 발생했을 수도 있을 것이며, 리의 고통도 그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더불어 감독이 영화속에서 묘사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재하지만 묘하게 존재감을 뿜어내는 리의 아버지를 비롯,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떰, 삼촌이기도 한 티어드롭, 친구 샐리의 게으른 남편, 그리고 아저씨라 불리울 이웃의 남자들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어머니/아내들이 반대급부로 긍정적으로 묘사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가부장적인 분위기를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므로 이 영화속에서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인물은 없다. 주인공인 리마저도 되바라진 애어른같은 설정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감독은 쇠락한 마을, 메마른 겨울, 아버지들과 그들에 속박된 어머니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먼저 이 영화의 배경인 작은 마을이라는 공간이 경제라는 이름으로 얽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 같다. 감독은 마약 카르텔에 대한 도덕적 단죄를 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 마을이 어떻게 형성되고 존재하고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영화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메타포들이 있다. 소를 키우는 것(카우보이), 노래를 부르는 것(컨트리 뮤직), 총기의 사용과 사냥으로 표상되는 생존방식은 바로 미국이라는 나라의 전통과 연관이 되고 있는 것이다. 떰이라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음직한 아버지가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소 경매장에 앉아 리와 첫대면하며 소들 사이로 사라진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국 리는 역사적으로 미국이라는 국가를 건설하고 제도를 만들면서 세상을 지배한 아버지의 실체를 찾아헤맸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노동을 찾아 나섰던 것. 그러므로 리의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두 손이 되는 것이다. 세상을 경작해 냈던 그 두 손 이야말로 아버지들의 존재증명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점은 리가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보고 있는 것이 사진이 아니라 옷()과 부츠()라는 것과도 통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 것인가? 세상은 이렇게 막연하게 굴러가야 되는 것일까? 꼭 여성감독의 영화라서가 아니라 <윈터스 본>에는 여자들의 연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이 있다. 가부장제의 그늘속에 억압되어 있는 것처럼 묘사되긴 하지만 동기야 어찌 되었던 리를 도와주는 인물이 모두 여성이라는 것은 주목할 부분이다. 친구인 게일을 비롯, 적대적이긴 하지만 음식을 나눠주는 이웃집 아주머니, 아빠의 시체를 찾아주는 머렙은 여성들의 연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거친 싸움밖에 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되는 남자들과 비교해보라. 또 하나 여전히 가족의 가치속에서 긍정적 방향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냉정하던 삼촌 티어드롭이 유일한 혈육이기 때문에 리를 돕기로 결심하는 것도 가족의 연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삼촌이 가져오는 병아리는 두 마리뿐이다. 리에게는 병아리가 없다. 그것은 리는 이 모든 사태를 겪으며 어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분명 리는 마을에 살고 있는 여느 엄마들과는 다를 것이다. 남편의 트럭을 훔쳐온 친구 게일과 함께 그녀는 더 이상 아버지라는 이름의 그늘에 안주하는 엄마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되바라진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이 되려는 리를 바라보는 여성 감독 데보라 그래닉의 바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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