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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용 감독의 1983년 작품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77 <초분>이후 시작되었다고 보여지는 옛 시대의 풍습이나 관습을 통해 사회비판적인 메시지와 예술적 성취를 지향하는 스타일의 정점에 위치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미 2년 전의 <피막>이 많은 주목을 받으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유려한 촬영과 편집등 기술적 부분뿐만 아니라 길례라는 여인의 인생사를 통해 지난 시대의 폐습을 비판적 시각으로 담아내는 스토리도 깊이있게 와 닿으면서 <피막>보다 더 나아보였다. 특히 <피막>이 주제라 할 만한 효를 설명조의 대사로 강조하는 잉여를 만들어냈다면 <물레야 물레야>는 이미지만으로 효과적으로 주제를 전달하는 절제도 마음에 들었다.

 

길례(원미경)은 몰락한 양반가문의 딸에서 죽은 남편에게 시집온 청상과부가 되었다가 양반가의 여종이 되고 다시 세도가의 며느리가 되는 운명의 순환을 온 몸으로 겪으며 조선시대 후반 여인의 질곡을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 영화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은 길례의 억압을 통한 가부장제 사회의 폐습이다. 그런 점에서 드러난 주인공인 길례와 함께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인물이 바로 그녀의 남편인 운보(신일룡)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몰락한 양반집 자손으로 양반댁 종으로 있다가 집안이 복권되어 다시 세도가의 양반이 되는 인물이다. 문제는 그가 하인으로 있을 때와 양반이 되었을 때의 이중성의 문제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운보가 아내인 길례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지만, 가문의 체통을 위해 자살을 강요하는 부분일 것이다. , 아무리 이상(?)적인 남자였다 하더라도 가문과 혈통을 중시하는 조선시대의 가부장제의 관습에는 저항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아니, 저항의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시스템의 견고함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가 발표된 당대의 현실과 겹쳐본다면 일종의 패배주의라 할 수도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어떤 타협의 흔적이 순수하게 드러나서 아쉽기도 한 작품이다. 분명 영화는 대규모 자본을 동원해 흥행을 목표로 하는 대중예술이다. 흥행의 승부사 기질이 다분한 이두용 감독 역시 예술적 성취와 동시에 흥행에 대한 욕망과 딜레마를 느꼈을 것이다. 가장 먼저 검열당국의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이 부분은 이 영화가 좀 더 쎄게 나아가는 걸 막고 있는 것 같다. 더불어 흥행에 대한 강박은 여주인공의 육체를 약간은 선정적으로 보여주게 만든다. 이런 점들이 이 영화가 좀 더 견고해지지 못한 원인인 것 같아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원미경이 80년대에 보여준 연기중 가장 좋은 연기를 하고 있고, 신일룡 역시 인상적으로 연기를 펼친다. 60년대의 히로인 문정숙의 주름살도 반가웠다. 이성춘 촬영기사의 촬영도 무척 멋있었고 말이다. 당대의 한국영화를 보며 느끼곤 하는 한계를 여전히 느낀 작품이긴 하지만 내겐 재미도 만만찮게 있었던 좋은 영화,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개봉 : 1984년 2월 25일 명보극장

감독 : 이두용

출연 : 신일룡, 원미경, 문정숙, 최성관, 최성호, 문미봉, 태일, 김지영, 박용팔, 이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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