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하길종 감독의 데뷔작 <화분>은 워낙 많이 알려지고 연구되어져서 뭔가 더 새로운 걸 보겠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영화처럼 보인다. 영화가 가지는 풍부한 정치적 상징성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만큼이나 세련된 스타일이 주목받기도 했다. 그렇다보니 나는 이 영화에서 건방지게도(?) 뭔가 새로운 걸 발견해 내리라 하는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대단하다는 이 영화를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는 것에서 만족을 얻으리라 생각할 뿐이었다.

 

어쨌든 다양한 정치적 알레고리를 상징적 미장센으로 대체하면서, 당시 직접적인 대사나 화면으로 구구절절 설명을 통해 관객들을 이해시켜야 한다는 한국영화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고 있는 점은 이 영화가 당대의 어떤 영화보다 스타일적으로 앞서가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나친 상징성이나 설명의 축약으로 인해 장면 장면이 부드럽게 넘어간다는 느낌은 조금 부족해 보였다. 이런 ‘튐’이 검열의 흔적인지, 아니면 연출의 의도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볼 일이다. 어쨌든 익히 알려진 정치적 알레고리를 형상화하는 부분에서 푸른집이라든지, 막혀있는 집안의 구조 등등도 흥미로웠지만 이번에 보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바로 단주와 현마의 동성애 부분이었다.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고, 모든 것이 규격화되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외치던 1970년대가 필연적으로 유신을 불러왔다면, 그 획일화 속에서 정도를 벗어나는 것은 무조건 가치치기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하길종 감독이 익숙하지 않았던 소재인 동성애를 끌어들였다면 일단 그 의도가 분명히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현마(남궁원)와 단주(하명중)의 관계는 동성애라기 보다는 양성애라고 말하는게 더 알맞을 것 같다. 몇 년전에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는 단주와 미란(윤소라)의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로맨스에 관심이 더 많았는데, 이번 재감상에서 눈에 띄는 것은 현마의 양성애였다. 그리고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것이 탐욕과 무책임함이라는 도덕적 결핍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새삼 감탄사를 다시 내 뱉었다. 어쩌면 정치적 알레고리라고 지칭되던 것들이 직접적인 한국의 정치상황을 풍자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보다 본질적으로 하길종 감독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부분은 인간의 내면이 감추고 있는 패악에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이런 패악이 정치적 부패를 용인하면서 독재를 불러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자와 여자를 모두 갖고야 말겠다는 현마의 탐욕과 그것에 편승해 편하게 살아보려 했던 애란(최지희)의 탐욕이 빚어낸 결과가 바로 영화 <화분>이 보여주고 있는 세상이자 하길종 감독이 바라보는 당대 한국의 현실이었을 것이다. 결국 큰 탐욕과 작은 탐욕이 충돌하는 그 푸른집 안에서 패배하는 건 작은 탐욕일 뿐이다. 큰 탐욕은 떠나면 그만이지만, 작은 탐욕은 미쳐야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길종 감독은 작은 탐욕에 만족하기 보다는 눈을 크게 뜨고 감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단주가 현마에게 ‘노’라고 얘기할 수 있는 용기와 그 푸른집을 감시하는 날카로운 눈초리, 그리고 모든 탐욕의 겉치레를 벗어 던져버릴 수 있는 주체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화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정치성이 아닌가 싶다.


개봉 : 1972년 4월 7일 국도극

감독 : 하길종

출연 : 하명중, 남궁원, 최지희, 윤소라, 여운계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