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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리아 아놀드 감독의 <피쉬 탱크>를 보는 내내 론 쉐르픽 감독의 <언 애듀케이션>이 떠올랐다. 비슷한 나이의 주인공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었고, 비슷한 상황을 겪으며 세상의 비정함을 체험한다. 단지 다른 것이라면 <언 애듀케이션>의 주인공인 제니가 중산층 부모를 둔 청소년으로 보호받는 존재로서 미래에 대한 불안을 표출한다면, <피쉬 탱크>의 주인공 미아는 아버지가 없는 하류층의 결손 가정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각박함까지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일정한 성취를 거두고 있는 두 영화의 주인공은 다른 공간과 시간을 살아내고 있지만 공통된 고민을 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꾼다는 것은 사실 두편의 영화가 같은 주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영국에서 10대 후반의 여자아이의 삶이란 어떤것일까? 두 영화에서는 공통적으로 유부남에게 연정을 느끼고 있고, 또 그 유부남에게 성적으로 농락당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언 애듀케이션>이 좀 더 깊이 있게 파고 들면서 위선의 문제를 들고 나온다. 하지만 <피쉬 탱크>는 그 문제를 성장통의 한 부분으로서만 다룬다. <언 애듀케이션>이 비정함을 강조하는 것에 비해, <피쉬 탱크>는 화해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제에 대한 접근방식이 다르다고 할까...

 

이제 좀 더 <피쉬 탱크>에 집중해 봐야 겠다.

 

아버지의 부재, 경제적 어려움, 아마도 미아와 비슷한 나이에 자신을 낳았을 젊은 어머니의 모성결여, 되바라진 여동생까지. 이미 미아에게 가정과 가족은 따뜻한 공간이 아니다. 그런 점을 아놀드 감독은 푸른색이 주조를 이루는 카메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미아의 방은 더욱 차갑게 촬영함으로써 그녀 내면의 고독과 황폐함같은 것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미아가 삶을 견뎌내는 방식은 어떤가?

동네의 넓은 공터에 묶여 있는 늙은 말을 풀어주기 위한 시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서 힙합춤을 연습하고.

엄마의 새로운 남자친구인 코노에 대한 연정이 전부이다.

 

하지만 미아는 묶여있는 늙은말을 풀어주는데 실패한다. 아마도 그것은 미아가 관습적으로 미성년이라는 굴레에 묶여 있는 힘없는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묶여있음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없는 늙은 말에게 일차적 원인이 있을 것이다. 말은 죽어서야 자신을 묶어 놓았던 사슬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미아는 그 고통스런 청소년기를 옭아매고 있는 그 빈민 아파트촌을 벗어날 수 있을까? 이미 미아와 같은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엄마는 여전히 그 빈민 아파트에 갇혀 살고 있다. 어쩌면 엄마의 인생이 여전히 아파트에 묶여 있다는 것은 늙은 말처럼 벗어나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미아가 늙은 말의 사슬을 풀어주려는 행위는 여전히 피쉬 탱크, 즉 어항에 갇혀 있는 자신을 비롯, 엄마와 동생의 해방을 위한 몸부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난 이 영화가 청소년용 영화로만 끝나지 않을 깊이를 담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영화 <피쉬 탱크>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쉽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화해를 향해 나아가는 몸짓이다. 그리고 현실이야 어쨌든 미아가 항상 희망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엄마의 남자 친구인 코노와의 섹스. 본의 아니게 엄마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 미아가 코노의 집에 찾아갔더니 아이까지 있는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미아가 드러내는 분노는 코노의 딸을 납치하는 것이지만, 죽음 일보직전까지 몰린 상황에서 그 딸을 구하고 다시 집으로 돌려 보내고, 격노한 코노에게 뺨을 맞으면서도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을 때 그것은 바로 성찰의 순간이며 성장의 순간일 것이다.

 

힙합 무용단원이 되겠다는 희망이 한낱 나이트 클럽의 스트립쇼를 위한 오디션으로 전락했을때, 그 클럽을 박차고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기필코 성취해내겠다는 성찰의 순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코노의 집에서 돌아오는 날 늙은 말은 죽어서 비로소 사슬에서 벗어났다는 얘기를 듣고, (피쉬 탱크, 어항)을 떠나기로 하는 미아(금붕어)는 그때서야 엄마와 여동생과 화해를 이루게 된다.


이 장면이 멋진 건 영화속에서 대사 한마디 없이 몸짓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미아가 평소 좋아하던 힙합음악을 듣고 있는 엄마와 힙합춤을 추고, 여동생까지 함께 추는 장면은 화해라는 이름의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퀀스는 떠나는 미아뒤로 풍선이 바람에 날려 그 빈민 아파트촌을 날아 오르는 것인데, 아마 그 빈민 아파촌이라는 어항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희망을 넌지시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전형적이지만 영화와 잘 어울리는 멋진 엔딩이었다.

 

안드리아 아놀드라는 여성감독이 만들어서 일까? 이 영화에서는 여성들의 연대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기도 했다. 미아와 엄마가 겹치고, 미아의 여동생과 코노의 딸이 또 겹친다. 엄마는 여전히 어항속을 떠나지 못했지만, 미아는 어항을 부수고 나가기로 했다. 이제 몇 년 후엔 미아의 여동생과 코노의 딸이 미아처럼, 혹은 <언 에듀케이션>의 제니처럼 성장해 똑같은 문제와 갈등을 겪을 것이다. 감독은 남자인 코노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는다. 세상은 언제나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고, 중요한 것은 남자, 여자가 아니라 어항을 부수려는 의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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