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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영화다 아니다라는 공방속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래서 그 기상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간판을 내려야 했던 영화 <청연>을 드디어 보았다. 일제 식민지 시기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였다는 박경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다 보니 민감한 민족주의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라는 수식어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영화 <소름>을 만든 윤종찬 감독의 2번째 프로젝트라는 것에 더 흥미가 있었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내 생각에 윤종찬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화를 잘 만드는 사람 중의 하나였고,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거의 박찬욱과 맞먹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90억이 들었다는 이 대작은 극장에서 겨우 1주일만에 막을 내렸고, 팬을 자처하는 나 조차도 여유 부리다 극장에서 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니, 영화흥행에 입소문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살떨리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더불어 계속되는 윤종찬의 흥행실패에 가슴이 쓰라리기도 했다.

 

도대체 왜 이영화가 친일영화라는 오명을 써야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박경원 그녀의 의지의 실현과정에서 보여진 일제와의 타협과정이 그렇게 한국인들의 비위를 상하게 했던 것일까? 식민시절 모든 한국인들이 순수한 독립투사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심정적으로는 독립을 염원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모든 소란은 투사가 아닌 회색지대에 발을 딛고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윤종찬 감독이 청연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 역시 이 지점인 것 같다. 영화 초반부 어린 경원이 조선에 들어오는 일본군대를 보며 떠올린 것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닌자였다는 설정부터 민족주의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또한 박경원이 그다지 독립운동에는 관심이 적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일장기를 다는 장면은 불편함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동안 국가주의에 의해 주도되면서 개인의 희생을 강요당해왔던 한국 근대사를 바라보는 윤종찬의 시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인을 전체위에 세우기 위한 작가로서의 몸부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은 또한 제도와 관습에 대한 도전인 셈이고 작가적 야망의 실천인 셈이다. 하지만 윤종찬의 야심은 박경원이 실패했듯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흥행에서 실패함으로써 사람들의 뇌리에서 빠르게 잊혀지면서 어떤 이슈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강박적인 한국적 민족주의는 월드컵의 열기로 다시 이어지고 있다.


 

역사를 방관한다는 것은 안되겠지만 식민시절 회색지대의 삶도 충분히 가치 있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본 후 비판하고 토론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몇명의 반대자들에 의해 여론이 휩쓸리는 건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다.

 

또한 영화적으로도 청연은 한국적 블록버스터이면서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주목받아야 할 영화다. 씨네21에서 듀나가 말했듯 청연은 한국판 데이비드 린 영화라는데 동의한다. 스펙터클한 화면을 뒷받침하는 촬영과 편집등 모든 면이 수준급이었다. 반면 장진영의 연기가 좀 불만이었지만, 남자친구로 나온 김주혁은 역할에 너무 어울렸던 듯 싶고 깨소금역할을 잘 소화한 것 같다. 


개봉 : 2005년 12월 29일

감독 : 윤종찬

출연 : 장진영, 김주혁, 유민, 한지민, 나카무라 토루, 김응수, 진태현, 이찬영, 이승호, 김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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