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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영 감독의 <죽이러 갑니다>는 돈 안들인 티가 난다. 저예산 독립영화다. 시각적으로 풍만한 이미지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그 여백을 채워야 한다. 기발한 아이디어라든지, 깊은 사회비판의식이라든지, 아니면 장르적으로 밀고 들어가기나 패러디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한다. 박수영 감독은 일단 세 번째 방법을 택한 것 같다. 그래서 호러에 코믹을 버무려서 재미를 추구하면서 메시지를 살짝 도출하는 방식. 전형적이라고 할만도 하지만 저예산 독립영화에서는 꽤 매력적인 접근방식일 수 있다.
<죽이러 갑니다>는 회사에서 해고된 노동자 김씨(이경영)가 엄사장 가족의 휴가지에서 그들을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는 잔혹한 장면이 이어지는데, 사건의 범인인 김씨는 “네가 짤라서 나도 짤랐다”고 말하는데, 이거 참 멋지면서도 오묘한 대사다. 짤려 생존의 위협을 받는 처지와 짤려 신체의 고통을 느끼는 것. 그 짤림이 가지는 의미는 영화에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데 박수영 감독은 조금 욕심을 많이 냈다. 재미도 있어야 겠고, 관객들의 가슴 속 깊이 묵직한 메시지도 주고 싶다보니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약간은 산으로 가는 무리수를 범했다고 생각한다.
자본과 노동의 문제라는 현 사회가 직면한 구조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그 기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에 대해 고찰하면서 가부장제의 문제로까지 확대하면서 영화는 길을 잃고 말았다고 생각된다. 이 두가지 문제를 잘 섞을 수 없었다면 한가지라도 깊게 파헤쳐보는 것도 좋았을 것을 말이다. 사건을 일으키는 자로서의 김씨의 존재가 영화 중반부에 갑자기 죽음으로 처리하면서 일단 영화는 힘이 빠져 버린다. 비록 가해자의 위치를 사건의 원인제공자였던 엄사장 가족에게 넘겨 다시 한번 자본가 가족의 배달원에 대한 강압을 보여주면서 김씨가 겪었을 문제를 살짝 환기시켜 주려는 의도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결정적으로 호러와 스릴러라는 장르의 공식에 집착하면서 영화는 힘을 잃어버리고 만 것 같다.
<죽이러 갑니다>는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다. 완성도를 떠나 생각할 거리도 많이 던져준다. 특히 “열심힘, 최선을 다해 일해야한다”는 말 속에 감춰진 잔인한 이데올로기의 그림자를 문뜩 깨닫는 순간이나 “짤라서 짤랐다”는 대사의 코믹함은 영화의 단점마저도 수긍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조금만 더’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박수영 감독이 좀 더 여유있게 만들었더라면 어땠을까? 충분히 멋진 영화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결국은 나에겐 그래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영화로 그치고 만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살짝 든다.
개봉 : 2011년 1월 20일
감독 : 박수영
출연 : 이경영, 김병준,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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