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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개봉한 박종호 감독의 <벽속의 여자>는 당대의 시각에서 파격적이라 할 만한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는 동시에 대담한 노출과 러브씬의 묘사 등 외설시비를 불러일으키며 파문을 만든 영화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에겐 무엇보다도 <미워도 다시한번>이나 여타 영화를 통해 대표적인 청순가련형 여배우의 대명사였던 문희의 색다른 변신이 더욱 흥미로운 영화이기도 하다.
여대생인 미지(문희)는 약혼자인 성민(남진)이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성불구가 된 것을 알고 방황하던 중 병원에서 만난 허사장(남궁원)과 육체적 관계를 갖게 된다. 성민과 허사장 사이에서 정신적 사랑과 욕망에 대해 갈등하던 미지는 두 사람과 모두 이별하며 홀로서기로 결심한다.
이 영화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주인공이기도 한 미지라는 여성 캐릭터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자신의 행동의 동기를 모두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한국영화의 여성주인공 유형과는 차별화되는 매력이다. 허사장에게 순결을 잃었을 때도, 허사장과의 섹스가 스스로의 선택이었음을 말하며 당당한 미지를 보라. 순결의 상실을 마치 목숨을 잃은 것 혹은 타락과 연결 짓던 당대의 영화들과 비교해 봐도 박종호 감독의 <벽속의 여자>는 분명 한걸음 더 나아간 여성 캐릭터를 선보이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감독의 이러한 도전이 영화 내내 성공적으로 지속되었다면 이 영화는 분명 한국영화사의 걸작으로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 것이다. 영화속에서 미지는 성공적으로 캐릭터를 구축해 나갔으나 감독의 내면 혹은 사고방식은 그 정도로 파격적일 수는 없었나 보다. 미지가 보다 숭고하다고 말해지는 정신적 사랑 대신 육체적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 영화가 끝났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감독은 기어코 조강지처의 위치를 재확인시켜주기로 결심한다. 물론 이것이 당시 주관객층이었을 주부에 대한 배려였을 수는 있다. 현실적으로 불륜을 주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배치되었을 허사장 아내(전계현)의 미지에 대한 응징(?)은 나름대로 미지와 대비되는 아내의 모습을 통해 벽속에 갇힌 여자와 벗어나려는 여자의 이분법을 드러낸 장면일수도 있다. 하지만 폭력이 동원되고 무기력한 미지의 모습을 통해 조강지처의 우월함(사실 이 장면에서 허사장의 아내는 상당히 초라해 보이긴 하지만 관객들에겐 안도의 한숨을 쉬게 만드는 장면일수도 있다)을 강조하고 있는 듯한 연출은 영화 전체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주제와는 좀 맞지 않는 장면은 아닌가 싶다. 균질적이고 싶지만 당대 질서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감독의 불륜질적인 면이 문제였던 것일까? 미지와 아내가 처음 대면하는 장면에서 잘못을 추궁하는 아내에게 미지가 그것은 허사장과 직접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대답할 때, 그 당당한 도전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하고 아내에게 린치를 당할 때의 모습은 감독 스스로 이 영화의 주제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50년대의 <자유부인>이 있었다면 60년대엔 <벽속의 여자>가 있다고 할 정도로 파격적인 영화였지만, 두 영화가 비슷한 지점에서 주춤거리고 있는 것도 공통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속의 여자>는 일정한 성취를 이룬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대사보다는 이미지로 인물들의 심리를 나타내려 한다거나, 대담한 표현의 시도를 통해 한국영화계의 관행에 도전한 점등은 인정받아 마땅하다. 분명 한계는 있는 영화였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가 어쨌든 인정받을 만한 영화라고 생각해 본다.
개봉 : 1969년 5월 28일 국제극장
감독 : 박종호
출연 : 문희, 남진, 남궁원, 전계현, 한은진, 김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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