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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가혹하구나. 정애(이영옥)의 운명이란. 왜 그녀는 그토록 가혹한 운명의 굴레에 시달려야 하는지...

 

<내가 버린 여자>는 60년대 후반 <미워도 다시한번>의 큰 성공으로 멜로드라마의 거장으로 불리게 된 정소영 감독이 1978년에 내 놓은 영화로, 그해 한국영화 흥행1위에 올랐던 작품이다. 그 당시의 관객들은 이토록 불쌍한 여자의 어떤 모습에 그토록 공감했던 것일까?

 

영화의 주인공 정애는 70년대 중반 가난한 여주인공의 어떤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는 공전의 히트작 <별들의 고향>이후 주인공인 경아가 가지고 있던 캐릭터의 연장선상에 있는 셈인데, 명랑하고 내숭도 없고 거짓말도 잘하고 통통 튀는 매력을 보여주지만 알고 보면 그런 인위적인 위악으로 가난과 편견에 맞서며, 남모를 아픔을 속으로 삭이는 그런 여주인공형 말이다. 그녀들이 인생을 어떻게 개척하는지는 영화마다 다르게 보여주지만 대부분은 사랑을 이루지 못하거나 비극적인 죽음을 맞거나 그도 아니면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버린 여자>의 정애는 그런 점에서 아주 친숙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어린 여자아이의 거짓말과 장난을 사람 좋은 웃음으로 받아주다 결혼하는 중년남성의 모습 역시 당대의 중년남성의 판타지를 공유하는 듯 익숙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이런 전형성으로 출발한 <내가 버린 여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소영 감독의 연출력에 의해 촌스럽지 않은 멜로드라마로 탄생하고 있다. 더글라스 서크로 대표되는 멜로드라마가 항상 계급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멜로물도 대체적으로 신분이 다른 남녀가 결혼에 이르는 과정의 험난함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계급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하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피상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마는 경우가 많은 편인데, <내가 버린 여자>는 대사가 아니더라도 화면이나 미장센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있는 점이 돋보이며 당대의 다른 멜로물에 비해 조금은 더 세련되게 다가오는 영화다.

 

<내가 버린 여자>는 오해로 인해 아내를 버리게 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남편 수형(윤일봉)의 회상으로 진행되는 구조로 인해 기본적으로 죄책감이 만들어 낸 디제시스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정애는 고아이며, 그나마 키워준 고모와의 사이도 별로 좋지 않다. 집보다는 거리가 편하고, 음악다방에서 친구와 수다를 떠는 것이 더 재미있다. 권투선수 민철(이계인)은 정애를 사랑하지만 정애는 관심이 없다. 그러다 우연히 만나게 된 전도유망한 기업의 부장인 노총각 수형을 만나게 된다. 정애는 장난스럽게 수형에게 접근하지만 곧 진실한 사랑을 느끼게 되고 두사람은 수형의 형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다. 정애는 상류층의 예의범절을 열심히 익히며 잘 살아보려 하지만, 곧 민철의 협박이 시작되고, 남편의 오해로 결혼생활을 파국을 맞고 정애는 죽게 된다.

 

이 영화에서 정애의 잘못은 거의 없다. 단지 그녀가 자신의 신분에 맞지 않는 결혼을 했다는 것이 죄라면 죄다. 결국 이 영화는 정애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남자들의 행동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다. 교양을 갖춘 수형이 거짓으로 만들어진 오해를 결국 극복해내지 못하는 것이나, 사랑이 아닌 돈 때문에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민철의 분노는 모두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쩌면 남자의 자격이 돈의 유무나 ‘넌 내것’이라는 소유성으로만 결정되는 천박한 사회에서 진실한 사랑을 갈구했던 정애는 희생양의 역할밖에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내가 버린 여자>는 70년대의 급격한 산업발달속에서 점차 인간성을 상실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우려가 내재해 있다. 그것은 기득권층이라 할 남자들이 아직은 약한 존재였던 여성을 대하는 방식을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된다. 어쨌든 수형은 오해로 인한 비극을 인지하고 속죄의 눈물을 흘린다. 반면 민철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민철의 분노가 정애가 아닌 수형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해야 한다. 수형의 속물성과 함께 돈의 유무에 의해 계급이 결정되는 현대사회에서 민철의 상대적 박탈감이 결국 정애를 죽음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다.


개봉 : 1978년 7월 7일 명보극장

감독 : 정소영

출연 : 이영옥, 윤일봉, 이계인, 박암, 전영주, 이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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