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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형 감독의 1976년 작품 <금욕>은 남성에게 받은 치명적인 상처가 여성들의 연대를 통해 치유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로 보인다.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영화라는 입소문을 탈 정도로 소재적인 측면에서 대담하게 접근하긴 했지만 시대적 한계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감독의 인식의 한계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산딸기 시리즈의 김수형 감독의 대표작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결국 고지를 눈앞에 두고 쓰러진 듯한 아쉬움을 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금욕>의 주인공은 강간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패션모델 영희(이영옥)와 전남편의 학대에 시달리다 이혼한 화가 한문정(노미애)이다. 디자이너 설은주(박원숙)에게 퇴출당하고 방황하는 영희를 미애가 돌봐주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정이 싹튼다. 특히 한문정은 남편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영희와의 사랑을 통해 극복해보려 한다. 그러나 영희는 설은주의 플레이보이 남동생 쥬리앙을 사랑하게 되고, 한문정의 곁을 떠난다. 하지만 쥬리앙의 아파트로 찾아간 영희의 눈앞에는 다른 여자와 같이 있는 쥬리앙의 냉소만 있을 뿐이다. 영희는 다시 한문정을 찾아가지만 이미 그녀는 상실감에 자살을 한 후였다.

 

김수형 감독은 영화속에서 새장에 갇혀 있는 새의 이미지와 그 새들이 새장을 벗어나 창밖으로 날아가는 장면을 등장시킨다. 새들은 영희와 한문정의 이미지를 상징하고 있지만 그녀들은 결코 자신들의 새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더불어 여자들의 연대에 대해서도 회의적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앞에서 시대적 한계와 감독의 인식의 한계를 이미 거론하긴 했지만 결국 <금욕>은 이 두가지 한계가 모두 섞여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김수형 감독이 여자들의 연대를 통한 극복 대신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라는 선정적인 소재로서만 접근했다는 것은 그녀들의 절망을 단지 전남편의 학대와 강간에 대한 기억이라는 일면적인 시선으로만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너머에 있는 본질적이고 견고한 폭력적 사회질서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 물론 <델마와 루이스>의 기개를 기대하진 않았지만 영희와 문정은 좀 더 용감해도 되지 않았을까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김수형 감독은 영희를 여전히 빠져나올 수 없는 불행의 회로속에 가두고, 문정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결말을 택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 혹시 그녀들의 불행을 통해 남자로 상징되는 사회의 폭력성이나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질서를 반추하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아마도 당시의 유신체제에 대한 소극적인 항변은 아닌가 하고 사고의 영역을 좀 더 확장시켜 볼 가치는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감독의 연출력이 좀 더 세련되어져야 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개봉 : 1976년 3월 13일 단성사

감독 : 김수

출연 : 이영옥, 신성일, 한문정, 이영호, 박원숙, 하용수, 정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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