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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 감독의 <이조잔영>은 안타까운 사랑이 있는 재미있는 멜로드라마다.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카지야마 토시유키의 원작을 각색했다고 하는데, 이 영화에서 오영일이 연기하고 있는 노구찌가 아마 그의 분신같은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난 노구찌(오영일)는 일본인이라는 우월감이 없는 여학교의 미술선생이다. 그는 조선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며 조선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으려고 하는데, 어느날 독립운동을 하는 동호(이대엽)을 숨겨준 후, 그의 소개로 한국 전통춤을 추는 영순(문희)을 만나게 되고, 이후 한국 춤의 매력에 빠져들며 영순을 사랑하게 된다.

 

이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점이라면 인물들을 전형적인 조선인, 일본인이라는 이분법으로 그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있었을 법한 다양한 인물군상을 각각의 배역에 부여함으로써 영화가 좀 더 풍부해진 느낌이다. 어쩔수 없이 일본인을 사랑하게 된 영순과 정치와는 무관하게 조선인이나 일본인이나 인간으로 접근했던 노구찌, 독립운동을 하지만 일본인과 친구가 될 수도 있었던 동호라는 캐릭터는 오히려 좋은 조선, 나쁜 일본으로 묘사되는 영화보다 더 현실적으로 당대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편이다.

 

<이조잔영>은 일제강점기라는 불행한 시기가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에 맞춰 일본에 대한 감정적인 대응을 자제하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상옥 감독의 메시지가 깃들어 있는 영화다. 19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과 1967년에 개봉된 <이조잔영>이 가지는 긴밀한 연관성에는 이런 정치, 경제논리도 숨어있는 것 같다. 당시 신상옥 감독이 박정희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도 유명한 사실이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전도된 프로파간다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당시의 관객들에게는 이 영화의 내용이 배반적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일제강점기 고통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착한 조선과 악한 일본인이라는 공식으로 진행되는 영화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대리 체험했던 관객들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로미오와 줄리엣풍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로 내러티브를 진행하면서 정치색을 희석시키고, 노구찌라는 착한(?) 일본인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일본에 대한 선입견을 지우고 있다. 아마 영화가 끝날 때 쯤엔 문희와 오영일의 안타까운 사랑의 감정만 뇌리에 남을 것이다. 어쨌든 내게 <이조잔영>은 일제강점기라는 시공간이 다른 비슷한 소재의 영화들보다 훨씬 사실적으로 다가온 영화로서도 가치가 있었다.


개봉 : 1967년 10월 11일 아카데미극장

감독 : 신상옥

출연 : 문희, 오영일, 이대엽, 이순재, 황해, 김동훈, 변기종, 전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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