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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산하고 그로테스크하면서 강렬한 음악과 함께 시작되는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은 병원에서 죽은 시체를 영안실로 옮기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당시의 병원 영안실은 정말 그렇게 낡고 음산했을까? 장르가 서스펜스 호러를 지향하다보니 일부러 미술을 그런식으로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쩄든 이 시체는 영화에서 중요한 복선으로 활용된다.
이후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된다. 외과과장인 노총각 광호(김진규)와 간호사인 진숙(문정숙)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있는 사이. 진숙은 광호를 결혼할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광호는 진숙을 섹스파트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 상태. 광호는 동시에 병원 원장의 딸 정자(방성자)와 사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눈치 챈 진숙은 순식간에 광호의 방해물이 되어버린다. 결국 광호는 진숙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영화에는 두 개의 주요한 계단이 등장한다. 하나는 병원 내부의 원형계단으로 대체적으로 성공을 의미하는 윗층으로 올라가는데 사용되고 있다. 촬영도 주로 로앵글로 촬영 되어 상승의 이미지가 강하다. 이것이 하이앵글로 바뀌었을 때 인물들이 처하는 상황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나머지 하나는 병원 외부에 있는 계단으로 대단히 가파르게 설계되어 있는데, 이것은 주로 하이앵글로 촬영되어 추락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하지만 내부에 있는 원형계단은 대단히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손잡이가 부실하여 언제라도 추락의 위험이 공존하고 있는데, 세명의 주요인물인 광호, 진숙, 정자는 모두 이 계단에서 추락한다. 여기에서의 추락은 어떤 욕망의 꺽임을 의미하게 되는데, 광호는 성공을 잃어버리고, 진숙과 정자는 사랑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이 계단은 60년대 초반 근대가 서툴게 욕망했던 것들이 미끄러지는 장소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마의 계단>은 스토리가 중요한 영화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서 가장 큰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부분은 물론 진숙의 생존여부이겠지만, 이만희 감독은 사소한 소품으로부터 서스펜스를 길어 올리며 긴장을 쌓아간다. 긴장을 조성하는 음악, 촬영방식, 흑백의 콘트라스트부터 시작해 사운드의 활용, 외부 계단에서 반짝이는 불빛, 호수, 영안실 등을 통해 분위기를 만들고, 배우들의 연기, 특히 간호장을 연기한 정애란의 절제되고 무표정한 연기는 정말 좋다. 결국 이 영화는 감독의 연출력의 여부가 무엇보다 중요한 영화인 것이다.
결국 <마의 계단>은 진숙의 복수극이기도 하지만, 광호의 지나친 성공에의 집착이 빚어낸 비극이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다른 여자의 남자를 뺏은 정자의 욕망, 의사를 통해 따뜻한 가족을 만들고, 더불어 신분상승까지 꿈꾸었을 고아출신의 진숙의 욕망도 모두 당대가 만들어낸 탐욕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이 영화에서 눈에 띄는 건 여자들의 연대라고 할 수 있다. 병원에서 기숙하는 간호사들은 아마 부르주아 정자와 대비되는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이다. 그녀들은 모두 진숙을 돕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너무나 가난해서 딸의 시체를 병원호수에 버리고 원장에게 돈을 갈취한 아버지의 범행까지도 진숙의 복수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광호의 살인미수는 만천하에 드러났고, 병원도 도덕성을 상실했다.
영화의 마지막. 목수는 다시 계단의 손잡이를 고친다. 하지만 누군가는 다시 그 자리에서 떨어질 것이다. 그건 근대 혹은 자본이 탐욕스럽게 혀를 낼름거리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개봉 : 1964년 7월 10일 명보극장
감독 : 이만희
출연 : 김진규, 문정숙, 방성자, 정애란, 최남현, 유계선, 조항, 독고성, 장혁, 이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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