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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값으로는 세계 최고라 할만한 스티븐 스필버그는 요 몇년사이에 그 이름앞에 예술이라고 불리는 미묘한 어떤 것을 욕망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오락 혹은 산업과 예술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영화라는 매체의 딜레마라면 90년대 이후 스필버그는 스스로 이 딜레마속에서 헤엄치기로 작정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직 결승점에 도착하기엔 그의 유영이 불안하다. 그는 너무 망설인다. 마치 전력질주를 하다 결승점 바로 앞에서 걸아가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그는 자신의 배경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 하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은 쉰들러 리스트를 삼천포에 빠뜨렸고, 백인이라는 그의 피부색은 아미스타드를 하얀색으로 칠해버렸다. 존경받는 선배 큐브릭의 후광을 이용해보기도 하고 잡을테면 잡아보라며 자신만만하기도 하지만 그의 실험은 언제나 인디아나 죤스의 채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게중 가장 안타까운 영화는 A.I도 아니고 바로 마이너리티 리포트다. 
이영화는 그의 장점과 단점이 모두 아울러진 종합 선물세트다. 결국 그의 유치한 휴머니즘은 그의 아킬레스건이다. 그의 아킬레스건은 결승점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약한 셈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두가지 점을 확실히 제시한다. 우선 범죄예방시스템이란 인간이 만든 것인 이상 결함이 존재한다는 것. 여기엔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은 부족한 존재이므로 인간은 인간 그 자체를 통제하지는 못한다는 가정이다. 결국 영화는 범죄예방시스템의 결함을 보다는 인간의 결함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 결함을 찾고 고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그 결함이란 어떻게 메꾸어질수 있는가? 우선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특별하고 새로운 가치관이라든가 혹은 전복적 상상력을 보겠다는 것은 애초에 기대를 접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도 우리는 그동안 그가 영화에서 끈질기에 보여준 구조인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연쇄구조를 보게 된다. 결국 그 결함을 채울수 있는 건 가족의 사랑이라는 논리로 달려간다. 가족의 사랑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형태가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판단의 여부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가족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축소된다. 그 연쇄가 제대로 이어지면 모든 결함은 치유된다는 식이다. 이 영화에서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그들의 임무는 임신하는 것과 남편을 돌보는 것에서 끝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식물을 동물처럼 만들어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상한 사람으로 변하거나 마약중독자이다. 또한 시스템을 공동으로 만들어도 결국 제외되어야만 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질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연쇄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얼마나 아버지라는 이름의 명예를 중시하는지는 버지스의 죽음씬에서 초절정을 이룬다. 이는 스필버그가 얼마나 살부를 두려워하는지 한마디로 증명하는 장면이다. 버지스는 존 앤더튼에 의해 죽지 않고 스스로 자살한다. 그로써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는 오이디푸스가 되지 않아도 되고 아버지는 스스로 명예를 지킨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어설프게 등장하던 오이디푸스 신화는 이렇게 우스운 꼴로 끝나버리고 만다. 결국 존 앤더튼은 다시 가족을 만들고, 아이(예지자)들은 편안해진다. 

얼마나 허탈한지... 결국 스티븐 스필버그는 결승점 너머의 세상을 보려하지 않는다. 질서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그 강박관념이, 변화된 세상의 불안정성(?)-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모르는-을 그는 끝내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는 결승점 바로 앞에서 멈출수밖에 없는가 보다. 그래서 더욱 그의 영화는 내겐 반동적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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