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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은 70년대 유신정권이 요구했던 국책영화도 종종 연출하곤 했다.
76년에 개봉된 <낙동강은 흐르는가>도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중의 한편으로 보인다. 그 와중에 이만희 감독은 국책영화인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전혀 국책스럽지 않게 만들었다 하여 그의 반골기질이 평가받기도 한다. 비슷한 시기에 임권택 감독은 <증언>을 만들어 흥행에 성공했다. 이만희는 반항하는데 왜 임권택은 반항하지 않고 유신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했느냐 하고 색안경을 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임권택이 만든 반공국책영화에서도 체제나 이념보다는 인간이 중심에 서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임권택 감독은 시스템에 표면적으로 저항하기 보다는 그 속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실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만희의 방식과 임권택의 방식. 어떤 것이 더 낫다고 쉽게 판단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속에 내재된 영화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고뇌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조차 없는 것 같다. 분명한 것은 70년대 당시 국책이 아니더라도 외화수입쿼터를 노린 반공물이나 계몽물들이 꾸준히 만들어졌고, 그 영화들이 보여주는 사고의 조악함이야말로 시스템에 부화뇌동한 결과가 아닐까? 임권택 감독은 시스템이 강하게 압박했던 국책영화의 외피를 통해 오히려 그 안에서 대중영화 문법을 실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했다. 그 등잔밑에서 임권택 감독은 자신의 영화세계를 규정할 다양한 씨앗을 심고 있었던 것이라고 해도 하나 이상할게 없을 것 같다.
<낙동강은 흐르는가>도 분명 평화롭고 자유로운 남한을 침공한 북한을 악으로 분명하게 규정하고 그들의 첨단무기인 탱크에 맨몸으로 저항한 국군의 활약상을 칭송하는 전형적인 반공영화의 내러티브를 학도군인 태식(진유영)의 시선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그려내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주인공 태식과 주요 부대원들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통해 구축된 캐릭터들은 자칫 딱딱하고 교조적으로 변할 수 있는 국책반공물에 재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고전 헐리우드의 영화양식을 적절하게 차용한 것이 무엇보다도 좋아 보였다. 팜므 파탈의 변형이라 할 만한 북의 여자스파이와 그녀로 인해 마지막 작전이 무산될 위기를 보여주는 방식은 그 유명하다는 히치콕의 서스펜스 공식을 그대로 차용한 듯 보였다. 그 덕분에 나는 꽤 긴장을 해야 했다. 단지 여자 스파이가 다른 국군들에 비해 스테레오 타입화 되어 아쉬웠지만, 당시 북한군 캐릭터에게 감정을 배치했다가는 비판을 당해야 했을 수도 있는 분위기였으니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해 못할 장면이 하나 있는데, 태식이 피난민 꼬마와 함께 북한의 탱크를 피하는 장면이 있다. 이 씬이 요구하는 것이 17살 태식(진유영)의 미성숙한 의협심인 것 같은데, 굳이 이 장면에서 10살짜리 꼬마와 함께 뛰게 만들어야 했는지? 만약 그렇다면 그 와중에 꼬마의 죽음으로써 비극성을 가중시키려는 의도였다면 그 꼬마에 대한 애도의 표현이나 혹은 태식의 죄책감 있는 표정이라도 있어야 함에도 전혀 그런 장면이 없다는 것은 솔직히 이상하게 보였다. 혹시 그 꼬마의 죽음이 태식 때문이 아니라 북한 여자 스파이에 의해 비롯되었으며 그로인해 책임은 북한군에게로 돌리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감독이 그 꼬마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이 영화의 가장 아쉽고 이해되지도 않는 부분이었다. 더군다나 그 장면과 병치되어 있는 군인의 죽음(장혁)에 대한 애도와 연계해 본다면 체제간의 전쟁으로 인해 고통 받았던 국민을 보는 관점이 어떠했는가를 조심스럽게 짐작하게 된다.
어쨌든 <낙동강은 흐르는가>는 장르로서의 전쟁영화로서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된다. 당시의 영화수준에서도 일정한 성취를 이루었다고 보여진다. 여기에 국방부와 문화공보부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는 것도 영화의 때깔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임권택 감독의 연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개봉 : 1976년 10월 23일 대한극장
감독 : 임권택
출연 : 진유영, 유영국, 김지혜, 장혁, 김희라, 박암, 황백, 이해룡, 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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