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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이 1978년에 발표한 <가깝고도 먼길>은 외화수입쿼터를 노리고 만들어진 전형적인 반공영화다. 이런 배경에다가 어린이용 영화라는 선입견까지 더해져 그다지 기대하지도 않고 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있는게 아닌가... 작품성은 둘째로 치고라도 말이다. 남한의 모범생 어린이 인철과 북한의 모범생 어린이 동만이 만나 서로의 체제가 더 좋다고 으르릉 대며 우겨대다가 결국 북한의 어린이가 남한의 체제를 인정하게 되는 이야기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아서 좀 마음이 아픈 영화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 영화는 제작자의 요구대로 국가의 시책을 등에 업고 어린이용 프로파간다영화로서의 모양새를 갖춘 후 대종상을 통해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외화수입쿼터를 따내는 것이 목적인 영화다. 그러므로 관객을 동원해 흥행에 성공하는 것 따위는 애초에 생각하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되고, 임권택 감독도 그냥 주문하니까 만들어 준 영화였을 것이다. 하지만 78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어떤 사정으로 81년도 대종상에서 반공영화작품상을 놓고 같은 감독의 <짝코>와 맞붙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수상에는 실패했고 개봉도 못한 것 같으니 제작자로서는 미운털같은 영화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전형적인 반공영화로 흘러가는 내러티브는 그다지 할 말이 없다.

남한 소년 인철과 북한 소년 동만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인철의 욕망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북한소년으로 키워진 동만의 내면의 변화를 통해 남한체제를 인정하게 만드는 심리의 변화가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그것은 김일성을 위시한 그들이 말하는 지상낙원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라는 것인데,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동원되는 것은 옷, 운동화 그리고 시계다. 동만이 인철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시선은 정확하게 이 세가지에 고정된다. 이것은 우회적으로 산업의 발전이라는 측면을 동원해 잘사는 한국이라는 이미지를 어린이들에게 부여한다. 이러한 물질에 대한 동경 이후에야 비로소 체제나 가족에 대해 흑백논리에 기반하여 좋은 한국, 나쁜 북한이라는 이미지 심기에 주력한다. 산업의 발전을 제1의 논리로 놓음으로써 개발독재시대의 초상화가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파간다만으로는 영화가 재미있을 수가 없다. 임권택 감독이 누군인가? 아무리 주문제작용 영화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영화적 얼개는 갖춰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끌고 들어온 것이 무인도 표류기풍의 이야기다. 이것은 아동용 영화에서도 그다지 무리가 가지 않는 설정이니 말이다.

 

인철이 어딘가에 표류하게 되는데, 알고 봤더니 그곳이 북한이라는게 알려지면서 영화는 서스펜스를 갖춘다. 여기서 살짝 반공영화의 카테고리를 떼어 놓으면, 우선 도시 아이 인철은 자연속에서 아무것도 할 줄 아는게 없다. 하지만 북한 아이 동만은 자연속에서 익숙하게 생존의 조건을 마련한다. 이는 표류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때 인철은 문명을, 동만은 원시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점은 더 나아가 남한은 문명, 북한은 원시라는 의미를 부여하며 북한의 낙후된 이미지를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기본적인 재미를 위한 설정 외에는 임권택 감독은 더 이상의 욕심은 내지 않고 반공영화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며 북한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기기에 주력한다. 임권택 답지 않은 두드러진 연출의 실수도 자주 보인다. 하지만 반공영화가 목적이 아닌가? 마지막 장면에서 인철과 동만이 휴전선을 넘을 때 무자비하게 총을 쏘아대며 결국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장면을 보면 달리 뭘 더 생각할 수 있겠는가? 죽일놈들이라는 생각밖에는... 그렇다면 이 영화는 결국 목적을 달성한 건가?

 

대체적으로 북한의 아이들은 기계처럼 교육받고 남한의 아이들은 자유롭게 교육받는다고 학습되고 있지만 <가깝고도 먼길>을 보다보면 심리변화에 따른 갈등을 보여주는 북한소년 동만보다는 줄곧 한국이 최고야, 잘살아, 배터져 죽는 사람은 있어도 굶어죽는 사람은 없다며, 대통령이 돌봐줄거라며 한치의 의문도 없이 꾀꼬리처럼 외쳐대는 인철이 더 기계적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이 영화가 의도하지 않았던 불균질의 순간일수도 있겠다 싶어 살짝 재미있다. 어쨌든 인철과 동만이 무사히 북한을 탈출해 인철의 집에서 2단 케이크 먹으며 잘 살았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총에 맞고 죽고 말았으니 마음이 아프더라. 더군다나 아이들 아닌가....


개봉 : 개봉기록 없음./1984년 TV방영

감독 : 임권택

출연 : 이진호, 손지훈, 방수일, 이자영, 김보미,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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