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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잊혀진 이름이지만 버스 안내양에 대한 추억은 내게도 있다. 초등학교 1학년때 한동안 다섯 정거장 정도를 통학해야 했는데, 이때 안내양(그땐 차장이라고 불렀는데...^^)에게 어느 정류장에 내려달라고 애기하면 비좁은 아침 출근시간대 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자신의 뒷자리에 세워놓고는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나를 정류장에 내려주고는 “잘가”라고 말하면서 “오라이”하던 기억이 있다. 그때 그 친절했던 안내양 누나들. 고맙습니다. 지금은 다들 50대 중후반이 되어있을 그녀들. 그러나 김수용 감독의 <도시로 간 처녀>를 보기 전까지는 그녀들의 인권이 어떻게 유린당해왔는지 알지 못했다.
김수용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이제 막 시작된 1980년대의 한국사회를 바라본다.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80년대가 되면 모두 잘 살게 된다고. 그런 80년대가 도래했지만, 그때의 한국은 여전히 나아질 기미가 없어 보인다. 가난한 집안의 여자아이들이 식모로, 공장으로, 버스 안내양으로 저임금에 시달리며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로 간 처녀>의 출발선도 바로 이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난한 농촌 출신의 문희(유지인), 고아로 자란 옥경(이영옥), 도시 빈민의 딸 승희(금보라)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가족의 생계는 그녀들의 여린 작은 손에 달려있다. 이런 부분은 승희의 에피소드를 통해 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도시로 간 처녀>의 가장 중요한 소재는 소위 ‘삥당’이라고 불리던 안내양들의 버스비 횡령사건이다. 그리고 이것을 막으려는 회사가 그녀들에게 행하는 비인권적 행태에 대한 고발에 있다. 그러나 감독은 삥땅 사건에 대해 단순히 범죄를 저지른다는 접근 대신 왜 그녀들이 그렇게 해야만 했던가 하는 동기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자연스럽게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사회문제로 접근하면서 사회고발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한다. 주제가 무거운데 반해 김수용 감독은 스타일적으로는 밝게 접근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20대 초반의 여자들이라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어쨌든 그녀들은 밝은 미래를 꿈꾸는 젊은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이율배반적인 스타일이 이 영화의 주제를 좀 더 묵직하게 다가오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 것 같다.
그런데 김수용 감독은 전복을 택하지는 않는다. 불합리한 사회를 뒤집어 엎어버리겠다는 과격함은 없다. 그보다는 불합리한 사회에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가에 대한 감독 나름을 소신을 피력하는 것에 주력한다. 세명의 여주인공의 운명이 어떻게 갈리는가는 주목할 만하다. 먼저 삥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옥경과 승희가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은 물질만능주의, 기회주의에 대한 감독의 거부감을 드러내는 장치일 것이다. 불합리한 사회에 대해 똑같이 불합리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거부감은 이 영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반면 문희는 삥땅을 도둑질이라며 어떻게든 불합리하더라도 그것을 성실로 뚫어보려는 인물이다. 영화속에서 그녀만이 희망을 쟁취하는 인물이라는 것은 김수용 감독이 지향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조용한 저항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므로 <도시로 간 처녀>에는 기성세대의 조용한 항변은 있지만, 무모하리 만큼 도전적인 젊음의 역동은 없는 셈이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접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당대의 한국영화계의 상황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유신을 살아낸 감독의 자충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이 정도 선에서 만족하며 약간은 도덕교과서가 되기로 작정한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우울한 내용이지만 영화는 활기가 넘친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는 웃음 때문에 더 그렇게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녀들과 그들의 젊음과 좌절과 희망이 있었기에 세상은 좀 더 나아졌는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결국 1981년 다시 시작된 암울한 전두환 정권에서 50대의 김수용 감독은 오직 젊은이들의 성실에 모든 희망을 걸었던가 보다.
개봉 : 1981년 12월 3일 중앙극장
감독 : 김수용
출연 : 유지인, 이영옥, 금보라, 김만, 한소룡(한지일), 트위스트김, 홍성민, 이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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