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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작품인 <레테의 연가>는 장길수 감독이 <밤의 열기 속으로>로 성공적으로 데뷔한 후 2번째로 발표한 작품이다. 이문열이라는 80년대 최고 인기작가의 원작. <신의 아그네스>로 최고의 연극배우로 등극한 윤석화의 영화 데뷔작이라는 프리미엄이 있었지만 흥행에는 크게 성공하진 못한 영화다.

 

원작을 읽어보지 않은 관계로 이 영화가 어떤 차별점을 가지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영화적으로는 감독의 역량을 성공적으로 펼쳐보이진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주제라고 할 만한 ‘여자에게 있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레테의 강을 건너는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과거를 모두 잊고 남편을 위해 새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영화 전체적으로 흐르고 있는 페미니즘적 분위기와는 뭔가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서 뭔가 어긋난 듯한 느낌을 많이 받게 되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장길수 감독이 80년대 한국사회에서 흐르고 있었던 여성의 인권에 대한 의견들, 가부장제에 얽매여 있는 사회구조에 대한 변혁의 작은 움직임을 인지하고 있긴 하지만, 정작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접근함으로써 영화가 지향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건 아닌가 싶었다.

 

이 영화는 결혼을 앞둔 연희(윤석화)가 유부남인 민화백(신성일)과의 힘들었던 사랑에 대해 회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처음부터 도덕이라는 관념을 필연적으로 끌어들이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장길수 감독은 조연을 활용해 풍부한 서브 플롯을 끌어들인다. 군대에서 제대한 대학동창(길용우)의 무분별함과 자신감이 지나쳐 저돌적이기까지 한 의사(박영규)를 통해 왜곡된 남자다움을 드러내는 것은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주제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라 자연스럽다. 그러나 연희의 회사동료(서갑숙)가 남자와 계약동거를 하는 장면을 묘사할때는 그녀의 자신감은 묘하게 부정적으로 보인다. 여기서 장길수 감독과 영화는 어긋나며 괴리되는 듯 보인다. 연희가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유부남인 민화백을 향한 사랑도 역시 당사자인 민화백의 도덕성으로 인해 기묘하게 거부당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원작자인 이문열의 문제인지, 감독 장길수의 문제인지는 둘째치고라도, 영화 감독이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인물을 주인공으로 다룰려고 하거나, 스스로 관심이 없는 주제를 선택해야 했다면, 일단은 거절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인물에 대한 연구를 좀 더 세심하게 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레테의 연가>는 순수한 사랑이라는 관념은 불가능한 것이고, 제도로서의 결혼만 남는다는 이상한 결론을 도출해 낸다. 그래서 엔딩 크레딧에서 연희의 결혼식 장면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굳은 표정이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자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나름대로 진보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 내적으로 순수한 사랑도, 계약연애도, 자유연애에 대해서도 모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다가, 결혼마저도 제도로만 기호화되면서 진퇴양난을 맞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결국 장길수 감독은 여주인공 연희에게 아무런 선택권도 주지 않았다. 제도로서의 결혼의 불합리함을 보여주려했다면 연희는 결혼을 거부했을 수도 있을텐데, 그녀는 결혼을 택했고, 만약 그랬다면 웃는 모습을 보여줄 만도 하지만 굳은 표정으로 마무리함으로써 그녀의 패배를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반어법일까? 아니면 80년대라는 시대에 대한 냉철한 성찰일까? 하지만 그렇게 좋게 생각하기엔 이 영화가 가진 어긋남이 꽤 크다.

 

어떻게 보면 <레테의 연가>는 기만의 영화라는 생각도 든다. 장길수 감독은 페미니즘적 성향이 강한 내용을 다루면서, 그것을 하나의 사회적 이슈로서만 접근했던 것 같다. 만약 그 물결이 자신의 가치관과 달라 거스르고 싶었다면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부각시켜 만들었다면 좋았을 걸. 감독의 어정쩡한 태도가 결국 어긋난 영화를 만들었고,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으며, 필연적으로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사실 여성관객을 겨냥하고 만들었을 게 분명한데, 이렇게 만들어 놓았으니 과연 어떤 여성이 공감하고 극장표를 사겠는가? 


개봉 : 1987년 4월 11일 대한극장

감독 : 장길수

출연 : 신성일, 윤석화, 길용우, 박영규, 서갑숙, 김성찬, 김애경, 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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