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임권택 감독의 필모를 채우고 있는 100여편의 작품중에서 73년 작품인 <잡초> 이전의 영화는 본인 스스로 모두 잊고 싶다고 말했고 실제로도 망각의 늪에 던져버린 것 같은 느낌을 그와 관련된 인터뷰를 읽으며 느끼곤 했다. 그렇다고 <잡초>이후의 영화들이 모두 자랑스러운 것만도 아니겠지만 어쨌든 스스로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변했기 때문에 좀 더 당당하게 관객을 대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뜻으로 짐작을 해본다.

 

임권택 감독은 70년대 이후 80년대 초반까지도 국책영화를 비롯한 수많은 영화를 만들어왔고, 게중에는 <족보>나 <만다라>, <짝코>와 같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영화가 있는 반면 엄청난 ‘언급’의 북새통속에 언젠가 호출되기를 바라며 조용히 뒷방에 앉아있는 이젠 제목마저 희미해진 영화들도 존재한다. 만듦새가 떨어져서든 혹은 흥행에 실패해서든 당시에 ‘언급’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영화들이 이번 임권택 전작전을 통해 다시 한번 호출되었다. 비록 모든 영화가 리마스터링이라는 꽃단장은 하지 못했지만 그 모습 그대로 수줍게 얼굴을 들어올리자 미처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던 영화들이 새롭게 다가왔고, 그 중에서 83년에 개봉되어 처절한 흥행실패를 기록했던 <나비품에서 울었다>는 내게는 잊혀진 자식의 귀환이라 할 만큼 새로운 영화로 다가왔다. 임권택 감독의 걸작리스트에 이름을 올릴정도는 아니겠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아이처럼 장난치는 임권택 감독을 느꼈고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이 영화마저 너무 좋아져 버렸다. 남들이야 뭐라하든 내겐 새로운 발견이었다.

 

옛애인을 찾아 강원도의 깊숙한 시골로 찾아가는 여자 현주(나영희)

그런 현주를 손님으로 태운 순박한 택시운전수 순호(이영하)

그리고 옛애인을 찾아가는 길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이 독특한 택시로드무비를 만들어내고 있다. 각가의 캐릭터가 뿜어내는 전형적인듯 하면서 비전형적인 기운들이 만들어내는 기묘함. 그 속에서 드러나는 허허실실 코믹함은 임권택적인 인물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멀리 가 있다.

 

게다가 주 플롯이라 할 만한 옛애인을 찾아가는 여정이 그다지 절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는 현주라는 인물이 절박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영화가 진행되면서 절박해지는 것은 택시운전수 순호다. 그는 계속 지체되는 만남을 현주보다 더 안타까워하는 것 처럼 보인다. 이는 아마도 이 영화가 현주가 옛애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순호가 현주에게 다가가기 위해 애쓰는 로드무비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 멋졌던 옛애인은 이제 너절한 인간으로 변해있다. 이것은 현주가 옛날에서 벗어나는 계기이면서 순호에겐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어쩌면 두사람은 옛애인은 여전히 멋진 사람으로 남아있는 것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르겠다. 옛애인을 찾는 여정속에서도 옛애인은 여전히 멋질것만 같은 여운을 남기며 눈앞에서 계속 사라진다. 하지만 너무나 갑자기 -영화가 진행되면서 관객에게 심어주었던 옛애인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라 할 정도로- 초라한 모습으로 그들 눈앞에 나타난 옛애인은 현주와 순호가 바랬던 모습이기도 했겠다는, 그래서 안도의 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현주는 눈물한방울로 과거를 완전히 잊을 수 있고, 순호는 현주의 마음에 들어갈 틈새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영화는 현주의 과거를 젊은날의 낭만으로 남겨두었고, 순호의 불타는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재미교포라는 현주와 가난한 택시 운전수 순호의 계급을 초월한 사랑이 이루어질것만 같은 그 숭고함이 극에 다다를것만 같은 그 순간에 이것이 한낱 부잣집 부인의 놀이동산속이었음을 알려주는 결말에서는 나름 아연했고 시대를 슬쩍 얹혀놓는 그 솜씨에 놀라고 말았다. 이렇게 80년대 초반에 무수히 나왔던 그저그런 한국영화의 한편쯤 되는 것처럼 시침 뚝 떼면서 결국 저만큼 날아올라있는 임권택 감독이라는 사람. <나비품에서 울었다>가 전형적인 걸작이라는 카테고리에 앉을일은 아마 없겠지만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분명 사실임을 일깨워주는 영화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더군다나 그 시절 수많은 영화에서 부잣집 도련님, 가난한 고학생이었다가 애인의 뒷바라지에 출세하고 부잣집 딸과 결혼하는 인간역할에 비슷비슷한 의상과 헤어스타일로 별볼일 없는 두루두루스타일의 연기를 선보이던 배우 이영하의 가장 좋은 연기를 본 듯 했다. 이것도 감독의 손끝에서 나온것이겠거니 하니 더욱 임권택의 손끝이 매서움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즐거운 것은 <나비품에서 울었다>라는 요요를 가지고 놀고 있는 임권택 그 자체였다. 진득한 무게감속에 감춰진 익살꾸러기 임권택을 볼 수 있는 영화는 흔하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비품에서 울었다> 이 영화가 참 좋다.


개봉 : 1983년 3월 12일 명화극장/코리아극장

감독 : 임권택

출연 : 이영하, 나영희, 최동준, 김옥진, 윤양하, 한소룡(한지일), 김기범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