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국영화/2010년대

아저씨

구름2da 2018. 9. 20. 23:41



600만명의 사람들이 본 영화라서 그런가 확실히 재미는 있구나.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단도직입적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우선 이정범 감독의 <아저씨>가 모티브로 삼고 있는 영화들에 대한 언급.

뤽 베송 감독의 레옹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레옹은 이미 존 카사베츠의 글로리아에서 모티브를 빌려왔을 거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깊숙한 곳에는 존 카사베츠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듯. 어쩌면 영화를 좀 본다 하는 사람들은 뤽 베송 보다는 존 카사베츠의 뒤에 줄 서기를 바랄수도 있겠다 싶어서. 더불어 대니 보일 감독의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보여지는 인도 빈민가 아이들을 다루는 범죄집단의 잔혹함은 불행하게 태어난 한국 어린이들의 잔혹사를 표현하는데 있어 참고가 되었을 법 하기도 하다. 그 외 무수하게 보여지는 이런 저런 장면들 역시 이미 익숙한 부분들이 많지만, 택시 드라이버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에서는 영화광 감독의 귀여운 애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이 영화들이 독창적이 아니군요 하면서 까고 싶어서 이런 주저리 주저리을 읊고 있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 영화가 여러 영화에서 가져온 익숙함을 나름대로 맛나게 요리했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이 영화에서 태식(원빈)과 소미(김새론)의 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이었다.

만약 이 영화가 레옹과 글로리아의 지리한 모방을 목표로 했다면 아마 태식과 소미는 영화가 시작하고 10분 정도 될 쯤 서로 손잡고 도망다니거나 아니면 납치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방식이 오락영화에서는 속도감을 높이는 작용으로 말미암아 더 유용하게 소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정범 감독은 스피드보다는 오히려 30여분을 투자하면서 태식과 소미의 관계만들기에 집중하고 있다. 나는 이런 점이야말로 모방을 통한 한국적 변형에 대한 감독의 고민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서양 영화라 할 수 있는 글로리아와 레옹은 10분 내로 사건을 빵 하고 터트리고 바로 도망친 후 이후에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에 집중하면서 유사 부모 혹은 연인의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면, 한국영화인 <아저씨>는 태식과 소미의 관계를 참을성 있게 상직적 혹은 유사 부녀관계로 까지 상승 시킨 이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사건이 터지고 행동에 돌입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관계 만들기에 대한 접근의 방법론이 혹시 한국영화와 서구영화를 구분할 수 있는 길을 터준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 것이다. 이러한 유사 부녀 만들기의 끝은 소미가 같은 반 남학생의 가방을 훔친 사건과 함께 등장하는 경찰과 피해 남학생 어머니 그리고 문방구 아저씨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는 “아빠”라는 호명으로 마감되고 있으며, 이후 본격적인 사건으로 돌입하고 있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칫 지루해질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이 30여분의 프롤로그는 관객들이 이런 관계의 급상승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태식과 소미의 장면들에서 보여지는 쏘세지를 매개체로 하는 따뜻한 시선이야말로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바램을 넌지시 드러내는 장면일 것이다. 이때 이후에야 소미는 범죄조직의 남자들에게도 아저씨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비롯된 아저씨의 의미 변화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아저씨라는 호칭은 일반적인 평범한 아저씨들이라는 보통명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미가 태식에게 말하는 아저씨와 일반 남자출연자들에게 말하는 아저씨는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하지만 일단 아빠라는 호칭은 가방 에피소드에서 태식이 소미를 외면함으로써 일단 거부되고 있지만 이후 태식의 과거의 죄책감과 결합되어 태식이 소미를 찾아나서는 복선으로 작용하고 더 나아가 태식의 아빠되기의 여정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뤄봤을때에 마지막 장면에서 “모르는 척 해서 미안해”라는 대사는 가장 확실한 종결점으로 마무리되는 수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아저씨>는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이미 그냥 아저씨로서의 태식에서 아빠로서의 아저씨 태식으로 호칭이 변경된 후, 영화는 태식의 과거를 전시하고 아빠로서 아내와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트라우마를 안고 있음을 알게 된다. 더군다나 그 이유가 국가라는 거대 권력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 했고, 이후의 자발적 은둔은 아마 그것에 대한 부정의 연장선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그가 소미를 지키기 위해 뛰어다니는 것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국가라는 거대 담론에 속한 집단보다는 오히려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소중함을 피력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영화는 자본에 지나치게 오염되어 정신이 황폐해져 버린 인간 유형들과 그들에 의해 저질러 지는 잔인할 정도로 전시되는 신체의 훼손이 보여주듯, 이런 비이성적인 상황을 초래한 것이 과연 누구냐의 질문에 까지 이르게 하는 것 같다. 그런점에서 소미의 입장에서 모두 아저씨로 호명되는 남자들의 모습이 중요해진다. 영화속에서는 결국 이런 아저씨들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국가기관으로서의 경찰, 범죄집단에 속한 남자들, 그리고 좀 더 나아가면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남자들까지. 영화는 모두 이러한 아저씨로서의 남자들의 욕망이 만들어 놓은 지옥도속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독이 영화 초반에 두 부류의 아저씨들로 분리하는 작업을 충실히 행하고 있다는 점은 더욱 중요한 포인트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영화의 종결을 향한 몸부림이기도 하겠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어쨌든 희망을 보고 싶은 바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해지는 것은 다시 아빠라는 호명이다. 아빠가 되지 못한 아저씨의 모습은 태식이나 문방구 할아버지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타타난다. 통나무 범죄조직의 아저씨들의 잔인함은 옆집과 문방구 아저씨의 온화함과 극도로 대비된다. 특히 문방구 아저씨(할아버지로 보이지만)가 소미의 도벽에 대처하는 방식은 아빠라는 이름으로 행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모습이다. 반면에 이 영화속에서 엄마라는 이름은 다소 부정적으로 사용된다. 소미의 엄마와 가방사건에서 보여지는 피해 아동의 엄마의 모습은 유의해서 봐야 할 부분이다. 특히 피해 아동이 아들이었고, 사건에 대처하는 그 아동의 엄마가 보여 지는 모습은 다소 과하게 묘사되고 있긴 하지만 엄마들이 아들(나아가 자녀)을 키우는 방식이 잘못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한 것이다. 엄마라는 이름을 부정적으로 다루면서 까지 아빠라는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은 부성애의 회복을 통한 따뜻한 희망을 보려고 하는 영화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식의 마지막 부탁은 소미의 책가방에 학용품을 채워주는 것이다. 그건 아빠로서의 아저씨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진한 사랑이다. 문방구 할아버지처럼 아이들은 도벽도 생기면서 커가는 거라며 이해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품게 되기까지 젊은 아빠 태식(원빈)은 도벽이 생기지 않도록 작은 사랑을 끊임없이 베풀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거대한 자본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에서 길어 올릴수 있는 것들이라는 것... 아마 아저씨는 그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고, 이 세상의 아저씨들에게 아빠와 같은 넉넉한 마음을 가져달라는 부탁인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세상은 이토록 잔혹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는 바램을 피력하는 것. 결국 생물학적인 아빠가 아니더라도 그 넉넉한 마음에 대한 바램이 느껴지는 영화처럼 보여서 더 재미있게 다가왔던 것 같다.

 

다시 한번 “모르는 척 해서 미안해”를 반복해보면서

그래, 모르는 척 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세상을 그려본다.

 

개봉 : 2010년 8월 4일

감독 : 이정범

출연 : 원빈, 김새론, 김희원, 송영창, 백수련, 남경읍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