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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 감독의 유작이자 소문으로만 들어보던 걸작, 1975년 작품 <삼포가는 길>을 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온통 눈으로 뒤덮힌 황량한 벌판을 걷고 또 걷고, 언덕을 넘고 또 넘은 세사람 정씨(김진규), 노씨(백일섭), 백화(문숙)의 여정에서 묻어나는 삶에 대한 끈끈함, 정, 슬픔, 유대의 모습이 가슴 가득 꽉 차는 느낌으로 다가오면서도, 뭔가 알수 없는 상실감을 동반한 회한의 정서가 꽉 찬 가슴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왜 그럴까?

눈덮힌 벌판을 웃으면서 뛰어오르고, 얼굴엔 함박웃음의 신명이 가득한 행복의 슬로우 모션이건만, 그래 이게 사는거지, 고생쯤이야 이렇게 한바탕 웃음으로 날려버릴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삶이지라고 말할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건 그때 그 한 순간의 기억에만 머물다보니 슬픔의 정서가 더 크게 다오는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이만희 감독이 <삼포가는 길>을 연출하는 태도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감독이 세주인공을 바라보는 관점은 연민이다. 그것은 희망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품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안타까움일 수 있다. 그 인물들의 미래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감독은 그들이 꾸고 있는 꿈이 곧 좌절의 순간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상실감이 크게 다가오는것 같기도 하다.


영화속에는 두 개의 꿈/희망이 존재한다. 하나는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되고 있는 정씨의 희망이다. 그는 10년만에 삼포라는 섬에 살고 있는 딸을 만나러 가는 중이다. 그 10년의 부재가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는 영화속에서 알 수 없다. 그저 감옥에 있었다는 것 뿐. 노씨, 백화에 비해 윗세대를 표상하는 정씨의 과거 10년은 그다지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을수도 있다. 다시 말해, 그다지 희망을 꿈꾸어 볼만한 시대가 아니었다는 메타포일수 있다는 것이다.그건 또한 1975년 이전의 한국사회 역시 희망적이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두 번째는 노씨와 백화의 사랑이다. 그들은 결합하기를 원하지만 그 결합은 이뤄지지 않는다. 노씨의 과거는 고향을 등지고, 도시의 삶에서 실패하고, 아내를 잃은 고통을 품고 있다. 하지만 영화속에서 노씨의 과거는 정씨와는 다르게 비교적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어쩌면 이는 노씨가 당대의 젊은이이면서 변방에서 살고 있는 자의 모습이라 추상적이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당대와 연관시키려고 한게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백화의 과거가 단지 고아로 제시되며, 어떤 한국적 비극의 시대를 환기시키는 선에서 머무는 걸 보면 확실히 노씨는 영화속에서 두사람과는 다른 시선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과거의 아픔을 간직한 세 인물의 꿈과 희망이 성취되었다면 감독은 미래를 희망적으로 보고 있는 것일테다. 하지만 그들의 꿈은 산산조각난다. 노씨는 백화와 눈물로 헤어진다. 지나치게 과장되게 연출되어 있는 두사람의 헤어짐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감독의 안타까움이 묻어나서 안타까운 장면이다. 백화는 노씨와 함께 아이 낳고, 저녁밥 짓는 일반적 여자의 삶을 소박하게 꿈꾸었지만 결국 그녀 앞에 놓인 것은 역전에 있는 작부집이다. 정씨는 삼포에 다리가 놓이면서 더 이상 섬이 아니라는 사실에 불안함을 느낀다. 그가 결국 딸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는 국가주의에 의한 현대화가 이런 소시민의 삶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지나친 패배주의는 경계해야 한다는 듯, 노씨가 다시 직업을 구하는 장면에서는 희미한 희망을 보고 싶은 감독의 바램을 보는 듯 하다. 결국 노씨가 좀 더 특별하게 다뤄진 것은 당대의 노동자/대다수 일반적 국민이기 때문인 것 같다. 결국 희망은 그들에게서 찾아질수밖에 없다는 것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노씨의 에피소드보다 정씨의 에피소드가 결말을 장식한다는 것은 유신으로 점철되어 있던 그 불온한 사회를 향한 비판의 칼날임에는 분명할 것이다.


개봉 : 1975년 5월 23일 국도극장

감독 : 이만희

출연 : 김진규, 백일섭, 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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