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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한국영화를 보면서 종종 유치하다는 인상을 받곤 하지만 그 유치함이 친근함에서 비롯되는 경우이다 보니 

항상 즐겁게 보곤 한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렇게 리뷰를 시작하는 이유는 76년 이원세 감독의 작품 <목마와 숙녀>를 

보면서 조금 유치해보이긴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친근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당대의 미녀로 유명한 정윤희 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웠을 20대 초반에 출연한 작품속에서 

정윤희는 아직 가다듬 어지진 않았지만 매력을 감출 수 없는 미모가 돋보이고, 당대의 미남으로 유명한 하명중이 

서글서글한 모습으로 등장해서 역시 좋아보이는 영화가 목마와 숙녀였다.


그럼 우선

70년대 중반의 연인들은 어떻게 데이트를 했을까?

허허실실 그저 잘 웃고 약간 수줍음도 있지만 그래도 뚝심있는 사나이 상규(하명중)

착하고 발랄하고 예쁘지만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정은(정윤희)이 만난다.


낙엽이 깔려 있고 흩날리는 가을길을 두 손 안 잡고 걸어가거나 뛰어가고, 

아직 개발되지 않은 듯 울퉁불퉁한 백사장(개인적으로 70년대 영화에서 자주 보는 이런 백사장 너무 좋아한다.^^)에서 

역시 뛰어다니고, 그러다 이유없이 백사장에 넘어져 목젓이 보일 정도로 함박웃음을 짓고, 

또 바람은 어찌나 쎄게 부는지 두 연인을 날려버릴 듯해 결국엔 포옹하게 만든다.




이원세 감독의 영화 목마와 숙녀에서도 상규(하명중)와 정은(정윤희)는 이렇게 데이트를 즐긴다. 

하지만 유치한 감정보다는 상당히 낭만적으로 그려지고 있어 유쾌하다. 

데뷔 초기에 연기력 부재로 지적을 받았다는 정윤희에게서는 전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할 만큼 적역이 아니었나 싶었는데... 

사랑에 막 빠진 수줍은 소년같은 감성과 표정을 보여주는 하명중의 모습도 무척 어울렸다.


대학 야구의 스타지만 슬럼프에 빠져있는 상규는 동생의 주선으로 정은을 만난다.

하지만 정은은 악성빈혈로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 

둘의 사랑은 깊어가고 상규도 슬럼프에서 벗어나지만 결국 정은은 죽고 만다.




이 3줄이면 영화를 다 본 거나 마찬가지지만, 나는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


첫장면에서 상규가 정은을 처음 만날 때 정은이 들고 있던 부라보콘을 들고 있는 것.

두 사람이 낙엽진 거리를 걸어가고 뛰어가는 것.

백사장에서 괜시리 몸을 배배 꼬는 상규도.

병원에서 나아보겠다며 투병의 의지를 불태우며 파자마를 입고 침대위를 팔짝팔짝 뛰는 정은의 모습도.

자전거를 전경에 두고 상규는 체인을 손보고 있고 그 사이의 여백으로 뛰어오는 핀업사진같은 장면도 좋고.

뜬금없이 내러티브에 개입하며 ‘쟤, 뭐냐?’싶게 만들었던 박원숙도.

TV에서 친근한 할아버진데 훌쩍 젊어져 나타난 신구도.

30여년이 흘렀어도 얼굴이 똑같은 최불암도

다 좋았다.


이런 순정만화같은 감성을 끈질기게 밀고 가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어쩌면 라스트 콘서트나 러브 스토리와 비슷한 감정을 유발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것은 정은의 죽음으로 인해 겪게 되는 사랑의 아픔이겠지만, 

생뚱맞게도 나는 감독의 의도는 다른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들이 결국 섹스에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순애보적이고 정신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이 영화가 온통 성적인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은과 상규의 첫 만남 이후 야외에서 그들과 함께 보여지는 배경은 모텔이다. 

그리고 정은은 스스럼없이 모텔에 들어갈 정도로 대범한 여성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첫 바닷가의 데이트에서 상규의 행동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몸을 비비 꼬는데, 

수줍은 몸짓으로 보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교태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영화는 정은의 허벅지, 상규의 나체 등등 성적 이미지를 계속 전시하지만 상규의 동생이 책으로 애써 눈을 가리듯, 

영화는 - 감독과 인물은- 결정적으로 머뭇거리고 마는데, 그건 아마도 70년대 중반의 당대의 가치관이 내리누르고 있는 

엄숙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즉, 몸은 뜨겁지만 찬물을 부어가며 애써 참아내야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엄숙함이 

당대 미혼의 젊은이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좀 귀엽고 예쁜 모습이지만 어딘지 좀 어정쩡한 연인의 모습을 그리게 된 건 아닐까?


뭐, 어쨌든 이런 부분들이 내가 좋아하게 된 이영화의 느낌을 갉아먹는 건 아니다. 

이런건 굳이 따지고 들어가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니 말이다. 

화면에 보여지던 그대로의 상규와 정은의 모습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웃음, 눈물, 절망, 환희를 말이다.



개봉 : 1976년 4월 10일 국도극장

감독 : 이원세

출연 : 정윤희, 하명중, 최불암, 신구, 박원숙, 민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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