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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영화 스타일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그의 영화는 점점 재미있어진다. 내 느낌은 이렇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점점 가벼워진다. 그냥 깃털 같은 느낌이다. 그러니까 그는 점점 영화라는 매체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표준 같은 걸 점점 내려 놓는데 주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다 보면 영화는 이래야 저래야 한다는 고정관념 같은 것에서 어느덧 벗어나 버리는 느낌이다. 그래서 부담이 적고, 그래서 가볍게 느껴지고, 그래서 깃털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지는 것 같은 것이다.

 

결국 이런 것들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 월드를 완성하는 스타일로 굳어지는 것일 테다. 매번 비슷한 유형의 인간, 특히 그다지 정이 안가는 인간들의 잘난 척 대화 같은 거나, 이미 페기 처분 되었다고 알려지다시피 한 줌을 활용한 촬영은 <극장전>에서는 상당히 낯설더니, 어느덧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는 컷을 대신하는 역할도 너무너무 자연스럽다. 그러다 문득 항상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이 영화에 전통적인 방식의 컷 혹은 오버 더 숄더 쇼트가 거의 없다 혹은 아예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뜻 화면이 밋밋해져 버릴 것 같은 그 화면구성에서 나는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는 건데, 그럴 때 솔직히 감탄하게 된다. 그러다 마치 따옴표처럼 인물에게로 살짜쿵 향하는 줌 만으로도 그들의 모든 심리가 와 닿아버리기 때문에 항상 대화 하는 두 사람의 편집은 이러 이러 해야 한다는 영화 이론서의 문구들이 어색해져 버린다.

 

인물 둘이 대화를 나눌 때, 서로 마주보고 있는 장면에서는 대부분 옆 모습을 보게 된다. 이것은 해원에겐 그다지 중요한 관계가 아님을 나타내는 장치다. 그러니까 마틴 스콜세지와 알고 지내는 교수는 해원이 느닷없이 결혼할지도 모른다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결국 해원에겐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인물이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햬원이 식당에서 엄마를 기다리다 잠들어 버린 채 꾸는 꿈 장면에서 제인 버킨과 만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꿈 속에서 해원은 제인 버킨과 그녀의 딸인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관계를 부러워하면서, 마치 다음 시퀀스에서 이어지는 엄마와의 관계에 대비시키는 듯 보이지만, 결국 옆 모습으로 등장하는 제인 버킨은 해원에게 의미가 없는 셈이다. 대학 동기들과 술자리 역시 마찬가지다. 성준에게 그 술자리는 초조하게 자신의 찌질함을 감추어야 하는 공간이지만, 해원에겐 가식이 넘쳐나는 그 공간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반면 해원에게 중요한 상황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왠지 겉도는 것처럼 묘사된 엄마와의 데이트 장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원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찌질함이 흘러넘치는 성준과의 데이트 역시 나란히 앉아 있을 때는 해원에겐 진실한 순간이다. 그래서 나는 홍상수 감독이 오즈 야스지로의 미장센을 오마주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고 보면 홍상수는 어느덧 오즈 야스지로를 닮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옆 모습. 나란히 있기 만큼 중요한 것이 또한 등을 보이는 뒷모습이다. 뒷모습은 대부분 성규의 차지인데, 아마 홍상수 감독은 성규라는 인물에게 성찰을 통한 성숙의 순간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몸은 어른이지만 마음은 자기 행동과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이인 성규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의 전형이다

 

그리고 남한산성의 깃발. 해원의 친한 언니로 나오는 예지원은 깃발이 흔들려야 바람이 부는 걸 느껴보죠라고 말했던가? 그 비슷한 말을 했는데, 와 닿았다. 중요한 것은 바람을 느껴본다는 것, 모든 중요한 인물들이 바람을 피우고 있는 상황에서 그 시적인 대사는 중의적으로 다가오면서, 한편으로는 홍상수 감독의 킥킥거리는 농담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깃발이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듯 평범한 사람들 역시 자신의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어쨌거나 당당한 해원은 얼마나 멋진 친구인가? 물론 내 친구라면 그다지 친해질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사실 홍상수 영화 속 인물들과는 그다지 친구하고 싶은 생각은 안드는 편이다.^^

 

여자는 당당하고 남자는 찌질하다. 홍상수의 영원한 변주곡이다. 그리고 홍상수는 점점 더 오즈가 되어간다고 나는 믿게 된다


개봉 : 2013년 2월 28일

감독 : 홍상수

출연 : 정은채, 이선균, 김자옥, 기주봉, 김의성, 유준상, 예지원, 류덕환, 안재홍, 제인 버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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