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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후반이 디스코의 시대라고 하지만 흐르는 코 닦기 바쁘던 나완 상관없던 시대였다. 하지만 내귀는 주위에서 흘러나오던 디스코의 리듬을 기억하고 있어 아직까지도 디스코는 즐겨 듣는 음악중의 하나이다. 하긴 잊을래야 잊을수도 없는게 디스코는 수많은 음악 장르와 결합해 뉴디스코(?)로 탄생하고 있으니... 항상 곁에 있는 음악 장르이기도 했다.


시대를 초월해 항상 질풍노도의 꼴통들은 존재해 왔고, 영화속의 청춘찬가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꿈과 좌절을 얘기하기를 즐겼다. 10년마다 대표작들은 쏟아져 나온다고 하더군. 누군가는 50년대 <이유없는 반항>, 60넌대 <이지라이더> 그리고 70년대는 <토요일밤의 열기>를 대표작으로 꼽고 있는데(네이버 홍성진 영화해설). 그럼 80년대는 내 나름대로 꼽아보자면 <블랙퍼스트 클럽>을 위시한 블랫팻 군단의 영화들이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러한 청춘영화들은 항상 당대 최고의 사운드트랙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50년대 <이유없는 반항>도 그러했는진 잘 모르겠다.^^) <이지라이더>가 사이키델릭을 전면에 내세워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진두지휘했다면, <토요일밤의 열기>는 디스코로 무장한 채 엉덩이를 흔들며 가벼운 시대였다는 (물론 미국의 얘기지만) 80년대를 예견했다고 생각된다.




마리화나로 범벅된 사이키델릭이 시대의 우울을 몽롱하게 토해내면서 <이지 라이더>의 폭주족을 선보였다면, 페미니즘과 퀴어가 부각되기 시작한 시대의 디스코가 남자와 여자의 경계를 지움과 동시에 시대의 고민도 함께 제거했다는 사실은 무척 재미있게 느껴진다. 엉덩이를 흔드는 존 트라볼타의 모습은 이전엔 분명 여성의 영역이었다. 재미있게 느낀 건 존 트라볼타가 여성의 영역이라고 할 만한 공간을 침범했을때, 여성은 골방에서 스트립쇼를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아주 재미있게 혹은 심각하게도 해석될 수 있겠다 생각해 보기도 했다.


청춘찬가의 영화가 예의 그렇듯 토요일밤의 열기에서도 별볼일 없는 토니의 일상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가 느끼고 생각하는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미래에 대한 동경보다는 지금 현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찰나를 즐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관인 셈이다. 하지만 그의 춤 파트너인 스테파니의 모습에서 보듯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에 가깝다며 감독은 잔소리를 늘어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 토니가 기득권과 별 상관없이 자신의 삶을 영위한다면, 스테파니는 언제나 기득권의 가치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아둥바둥 살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거리를 걷고 있는 토니의 구두를 클로우즈 업으로 보여준다. 그의 경쾌한 발걸음, 잔뜩 멋부린 의상, 멋진 셔츠에 대한 집착. 그런데, 그가 풀 쇼트로 보여지면 들고 있는 페인트통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데, 이는 토니가 노동계급 출신임을 보여주고 있다. , 그는 노동하는 젊은이였던 것이다노동과 첨단 유행의 기묘한 동거. 칙칙한 노동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가 없지만 그의 현실은 노동을 해야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젊은이인 것이다.


현실에서 토니는 별볼일 없는 청년이다. 1달러 50센트 봉급인상에 날듯이 기뻐하는 평범한 청년이다. 아버지가 토니의 월급에 대해 불평할때 그는 인생에서 두가지 기쁜 것은 월급이 오르는 것과 디스코텍에서 춤을 추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생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되는 건 아닌 것을 차츰 깨달아 간다. 그는 본의 아니게 그만 두게된 페인트 가게의 사장이 자신을 다시 붙잡자 잠시 좋아하지만, 여기서 누구는 15년을 일했고, 누구는 20년을 일하고 있는데, (토니)도 그렇게 해야 되지 라고 말할때, 토니는 그 두사람을 보면서 그의 인생이 저당잡혀버릴 것 같다고 생각한다.




또한 토니가 그토록 원하던 댄스경연에서 스페파니와 함께 출전해 1위를 하지만, 자신보다 더 뛰어난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댄서들이 인종차별에 밀려 2위를 한 것에 분개해, 트로피와 상금을 그들에게 줘 버리고 다시는 디스코장에 오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사랑을 느끼고 있던 스테파니와도 싸우게 된다. 이어지는 친구의 어이없는 죽음 이후 토니는 스테파니를 찾아가서 진정한 친구가 되어줄 것을 간청하며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결심한다.


청춘영화로서 <토요일밤의 열기>는 갈등과 교훈 그리고 당대의 유행코드를 적절히 가미한 더할나위 없는 오락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 교훈 또한 당대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음으로써 관객의 안정욕구를 채워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가장 큰 주제인 디스코는 미래를 담보하는 어떤 것이 아님을 영화는 고백하고 있다. ,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었던 디스코춤이 실은 아무것도 아님을 말하기 위해 영화는 달려온 셈이다.


토니의 형 프랭크가 말하듯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또한 그 대사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부모가 원하는 사제직을 버린 프랭크의 입에서 나왔음으로 이 말은 상당히 긍정적인 파장을 몰고 온다. 하지만 프랭크가 사제(사회의 기본축중 정신적인 파트 담당)를 버렸다고 해서 디스코를 선택하지 않는다. 디스코는 미래를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춤의 1인자가 되고 싶었던 토니 역시 결국엔 디스코를 거부한다. 헤게모니가 바라는 진정한 성장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화 내내 보여지던 춤을 위해 노력하던 토니의 행위는 쓸데없는 시간낭비가 되어버린다.




토니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주인공은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관객들에게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춤 파트너이자 사랑을 느끼게 되는 대상은 아넷이 아니라 스테파니가 되는 것이다. 스테파니는 주구장창 미래의 희망을 얘기하고, 현재는 미래의 성공을 위해 준비하는 시기라고 되뇌인다.


결국 토니가 디스코텍에서 느끼는 것은 절망이다. 인종차별이 횡행하는 공간이며, 토니가 돋보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지만 그곳은 세상과 격리되어 있다. 디스코장 밖의 공간은 저임금과 실직, 친구의 죽음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디스코장은 하나의 판타지 공간일 뿐이다. 그러므로 토니가 돌아갈 곳은 스테파니의 집 밖에는 없을 것이다. 스테파니가 비록 속물근성이 득실 거리는 여자라고 하더라도, 그녀는 유일하게 외부=자본주의 사회와 연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어쩔 수 없다. 사회는 속물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들 그 속물의 세상으로 들어가서 같이 젖어버리든 혼자 독야청청 견디든간에 사회의 질서속에서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진정한 성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재미있었던 <토요일밤의 열기>는 긍정적 가치관이라고 강요되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잔소리를 함으로써 실망스럽게 끝이 나고 말았다. 디스코장이 닫힌 공간이 아님을 말할 수는 없었던 걸까?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전세계적인 성공을 거둘 순 없었겠지? 말 잘듣는 아이가 되는 것이 어른의 안심을 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겐 잠시 일탈의 해방감을 맛보게 한 후 무한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다시 늙어가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역시 춤추는 장면은 정말 신나더라. 디스코의 시대, 그 속에 도사린 노동계급의 그림자를 이십여년 뒤 피터 카타네오 감독은 <풀 몬티>에서 제대로 잡아냈다. 가치관의 변화에는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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