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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고영남 감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만든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장르를 만들기도 했지만 몇 작품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그 수준이 높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걸작이라고 불릴 만한 <소나기>를 비롯해 가끔 완성도 있는 작품을 개봉하곤 하는데, 81년에 개봉된 <깊은 밤 갑자기>는 약간 아쉬움은 있지만 한국 공포영화사의 걸작이라고 해도 될 만큼 재미있고 잘 만들어진 영화였다. 여주인공 선희의 내면에서부터 발생한 공포를 만들어내는 방식도 인상적이고, 시각적으로도 꽤 쇼킹한 장면이 많았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베낀 한 장면은 그냥 허허실실...^^


나비채집을 위해 자주 집을 비우는 강유진(윤일봉)에게는 아름다운 아내 선희(김영애)와 딸이 있다. 남편이 수집한 나비의 슬라이드를 보는 도중에 하얀 옷을 입은 목각인형이 끼어 있고 선희는 강렬한 그 이미지에 알 수 없는 공포심을 느낀다. 그리고 또 다시 나비채집을 떠난 남편은 미옥(이기선)이라는 무당딸을 데리고 온다. 그런데 미옥은 그 슬라이드 속의 목각인형을 가지고 있는게 아닌가...



<깊은 밤 갑자기>는 선희의 불안함이 영화전체를 지배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 목각인형의 이미지는 대단히 강렬한데, 결국 선희의 내면에 억압되어 있던 어떤 것의 두껑을 열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남부러울 것 없는 귀부인으로 살고 있는 선희의 불안함은 무엇일까? 우선 초반부 선희가 100% 의지하는 남편의 관심이 온통 나비에게 쏠려 있음을 영화는 계속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선희는 남편의 관심을 앗아간 나비라는 대상에 대해서는 그다지 불안함을 느끼지 않는다. 즉, 나비라는 대상은 남편의 육체는 강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비의 사진들 속에서 불쑥 나타나는 인간 형상의 목각인형은 그 자체로 대단한 공격성을 띄고 있다. 아름다운 모습이라도 나비는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추한 외모라고 해도 목각인형은 인간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선희의 내면에 억압되어 있던 불안함은 이렇게 불현 듯 드러나고 만다. 그 목각인형은 남편의 시선이 완전히 다른 종인 나비가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과 함께 선희의 마음에 남편의 외도에 대한 불안함을 가져오는 매개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친구와의 대화에서 30을 넘긴 여자의 사그라드는 육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선희의 시선은 외설잡지의 싱싱한 여자모델에게 가 있는 것이다. 결국, 선희는 자신의 사그라드는 미모와 육체 때문에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해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런 의심은 남편이 19살된 시골처녀 미옥을 가정부로 데려오고, 그녀의 육체가 무엇보다도 곱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선희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선희는 서서히 의심을 쌓아가다 결국 미옥을 죽이게 되는데, 이때부터 선희의 성에 대한 불안함에 죄책감이 더해져 광기로 귀결되고 만다.


사실 장르적으로 아주 흥미진진하고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다. 더군다나 80년대 초반 아직까지는 높지 않았던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도 잘 고찰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경제력을 무조건 남편에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인의 최대의 적은 자신이 잃어버린 젊은 육체를 소유한 어린 여자들이었을 것이다. 미옥은 대체적으로 남자들의 로망이라고 알려져 있는 형태로 등장한다. 예쁜 얼굴과 고운 우유빛깔의 살결, 처녀이며 육체적으로 금방 터질 듯 풍만하며 게다가 백치미까지 가지고 있다. 결국 선희가 성적욕망을 내면으로부터 억눌러 왔던 이유는 교수부인으로서 조숙해야 한다는 그녀의 생존의 첫 조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존조건은 시간과 함께 자신의 육체가 자연스레 시들면서 위험에 봉착하게 된다. 어쩌면 선희가 마지막 장면에서 목각인형과 같이 모습으로 변해있는 것은 목각인형의 주인인 미옥의 육체를 훔치고 싶었던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선희는 더 이상 생존할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직 여성의 지위가 낮을 때 남자(남편)의 무관심이 얼마나 가정의 불행을 초래하는 것인가를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할까? 차라리 자신을 나비라는 존재와 동일시했을 때 선희는 편안했다. 남편이 나비를 사랑하듯 자신을 사랑한다는 환상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각인형이라는 인간의 형상이 침입하며 그 동일시가 깨어졌을 때, 조숙한 교수부인으로서의 선희는 억눌렀던 섹슈얼리티의 욕망이 온 세상을 잠식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듯 고영남 감독은 <깊은 밤 갑자기>에서 한국사회에서 취약할 수 밖에 없는 여성의 위치라는 문제를 공포라는 장르를 통해 말하면서 완성도를 높였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전히 섹스의 문제를 무당의 딸과 연관시킴으로써 전근대의 영역에 묶어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 평화로웠던 강유진과 선희의 가정이 붕괴되고 선희가 광기로 치달은 것은 그녀가 섹스에 대한 욕망을 끝까지 억누르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결국 스스로 자신을 처벌한 셈이다. 한 가정의 부인으로서 성적욕망을 억누르는 것에 실패한다는 것은 목각인형/무당/가장 미천한 신분으로의 강등밖에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됨으로써 남편 강유진은 죄의 카테고리 밖에 머무른다. 아내의 공허함을 제대로 채우지 못한 남편은 자연스레 면죄부를 받게 되고 가정의 붕괴는 오로지 아내의 죄로 남게 되는 것이다. 



개봉 : 1981년 7월 17일 피카디리극장

감독 : 고영남

출연 : 김영애, 이기선, 윤일봉, 김민규, 김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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