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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오필스 감독의 짧은 단편소설 같은 이 러브스토리는 장편 같은 긴 여운을 남긴다.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는 한 여인의 짝사랑의 기록이기도 하겠지만, 어떻게 보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졌던 한 여인의 기록이기도 하다. 나는 이 신파 영화속의 리자(조안 폰테인)라는 여주인공이 단순히 사랑의 희생양이라거나 바람둥이 남자 때문에 신세 망친 피동적인 인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주체적으로 보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는 여자로서 말이다. 리자는 죽음에 임박해서야 자신이 평생을 사랑했던 남자에게 편지를 쓰며 고백한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에게 결코 사랑을 구걸하지 않았다. 멋진 여자다.

 

1900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중년의 피아니스트 브랜트(루이 주르당)는 누군가와 사건에 연루되어 새벽의 결투를 앞두고 있다. 그는 그 결투를 피해 도시를 떠나려고 한다. 은근히 비겁해 보인다. 이때 집사가 어떤 여인에게서 온 편지를 건네준다. 그 편지는 평생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 리자의 러브레터였다.

 

10대 소녀인 리자. 그의 옆집에 잘 생긴 미남 피아니스트 브랜트가 이사온다. 리자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피아노 선율에 감동하며, 잘 생긴 브랜트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의 관심을 끌려고 노력해보지만, 아직 소녀에 불과한 그녀에게 브랜트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어느날 리자의 어머니가 재혼을 하게 되어 비엔나를 떠나야 할 처지가 된다. 그는 브랜트에게 고백하기 위해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만 결국 바람둥이 브랜트의 여성편력 현장만 확인한 채 돌아서고 만다.

 

18살의 결혼적령기가 된 리자. 오스트리아의 젊은 군인의 구애를 정중하게 거절하고 다시 비엔나로 돌아와 의상실에서 일하며 브랜트 주위를 서성거린다. 어느날 브랜트는 리자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데이트를 신청한다. 리자는 소원이 이루어져 기뻐한다. 멋진 하룻밤을 보내는 리자와 브랜트. 하지만 브랜트의 연주여행 일정으로 그들의 만남은 지속되지 못한다. 2주후에 돌아오겠다며 떠난 브랜트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리자는 브랜트의 아이를 출산한다. 하지만 브랜트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아이는 자신이 키우며 브랜트에게 부담을 주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다. 이 장면에서 리자라는 여인의 강한 면모를 보았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상투적인 희생을 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리자는 그렇게 매달리지 않음으로써 브랜트를 둘러 싼 여러 여자들 가운데서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리자는 그만큼 적극적이었고, 당시 19세기 일반 여성들과는 다른 강인한 여자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00, 비엔나> 라는 자막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방점은 ‘1900에 찍여야 한다. 고리타분한 19세기 빅토리아 왕조시대는 끝났다는 것. 그래서 여성이 좀 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리자가 미혼모로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리자는 혼자 아이를 키운다. 아이가 커 가면서 그녀를 사랑해주는 남자와 재혼도 한다. 부유한 생활을 누리는 리자. 어느날 오페라를 보러간 극장에서 운명적으로 다시 브랜트를 만난다. 리자의 과거를 모두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남편은 리자가 흔들리고 있음을 직감한다. 남편은 성인이라면 아들과 가족을 위해 통제해야 한다고 넌지시 말한다. 리자는 격정에 쌓여가는 자신을 통제하기가 힘듦을 인식한다.

 

아들이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는 날. 리자는 브랜트의 집을 찾아간다. 이 모든 것을 남편이 보고 있다. 하지만 리자는 브랜트가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신이 한낱 하룻밤 연애의 대상이었음을 깨닫는다. 리자는 브랜트 몰래 집을 나온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사랑에 혼란을 느낀다. 이후 며칠동안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간다. 아들은 장티푸스에 걸려 죽고, 리자 역시 같은 병에 걸려있다. 리자는 편지에 그녀의 사랑을 고백하기로 한다.

 

 

 

편지를 다 읽은 브랜트는 눈물을 흘린다. 브랜트는 집사에게 그녀가 찾아왔을 때 누군지 알고 있었냐고 묻고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름을 적어준다.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브랜트. 그는 리자와의 과거를 기억해 낸다. 그리고 비겁하고 피폐해졌던 자신의 삶을 뒤로하고, 담담히 결투를 하러 나간다. 결투의 상대방은 바로 리자의 남편이었다.

 

영화가 끝나면 뭔가 각성의 기운을 주는 것 같다. 부여된 재능으로 사랑을 기만하며 삶을 낭비했던 사람이 진실한 삶과 사랑을 추구했던 누군가로 인해 삶에 대해 깨달음을 얻는 남자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관객 역시 그 눈물과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들어가 보자면 조안 폰테인이 멋지게 형상화 해낸 리자라는 여인이 보여주는 주체성에 감동하게 된다. 어쩌면 그녀는 시대에 대항한 여인이 아니었을까? <센스 앤 센서빌리티>에서 보듯 당시의 여자들은 청혼을 받기를 오매불망한다. 하지만 리자는 적극적으로 사랑을 찾아 나선다. 이것은 사랑에 속고 우는 신파가 아니라, 오히려 막스 오필스 감독은 페미니스트가 아닐까 할 정도로 주체적인 여인상을 그리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단순히 신파가 아니라 시대를 앞선 영화였다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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