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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끌로드 샤브롤은 앙드레 바쟁의 아이들인 까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 중에서 <미남 세르쥬>를 만들면서 가장 먼저 감독으로 입문했다. 바로 그 유명한 누벨바그가 막 시작된 것이다. 물론 그들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년 뒤 프랑소와 트뤼포가 <400대의 구타>를, 장 뤽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를 발표하고 성공을 거두면서 부터였지만 끌로드 샤블롤은 그들과는 또 다른 작품세계로 누벨바그의 한 축을 당당하게 장식했다. 알려진 바로는 <미남 세르쥬>는 바로 개봉을 하진 못했다고 한다. 2번째 작품인 <사촌들>이 성공하고 나서야 비로소 개봉되었다고 하니 시작부터 탄탄대로는 아니였던 셈. 개인적으로는 <사촌들>의 완성도가 뛰어났다고 생각하지만 <미남 세르쥬>의 감성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히치콕 매니아로 알려져 있듯 이후의 작품세계가 미스터리나 스릴러 장르였던 것에 비해 데뷔작 <미남 세르쥬>는 드라마였지만 음악은 위기감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면서 이후의 작품세계를 엿보게 하는 단초를 보는 듯 했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공부하고 있는 프랑소와(쟝 끌로드 브리알리)는 몸이 약해져 요양차 고향에 돌아온다. 도착하는 날 친구 세르쥬(제라르 블랑)를 만나는데, 그는 술에 잔쯕 취해 있는 모습이다. 프랑소와가 생각하는 어린 시절의 세르쥬는 누구나 좋아하는 멋진 아이였다. 하지만 현재 세르쥬는 엄청나게 술을 마시면서 불행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프랑소와는 그런 세르쥬를 안타깝게 여기며 그를 도와야 겠다고 생각한다.

 

끌로드 샤브롤 감독은 자신의 데뷔 영화에서 큰 욕심을 부리지는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트뤼포나 고다르가 엄청난 에너지로 영화를 압도했던 것에 비하면 샤브롤은 소박하게 시작한 편이다. 샤브롤 감독은 자신의 연배와 비슷한 인물들을 들여다보며 그저 당대의 프랑스 젊은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50년대 후반의 프랑스가 어떤 상태였는지는 머나먼 한국에 살고 있는 내가 알수는 없다. 하지만 <미남 세르쥬>나 트뤼포, 고다르 영화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젊은이들이 느끼는 박탈감이 심한가 보다 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경직성이 누벨바그의 혈기왕성한 감독들을 자극한 것은 아닌가 하고 잠시 생각해 본다.

 

아내의 출산소식을 듣고 활짝 웃는 세르쥬의 모습


<미남 세르쥬>에서도 세르쥬의 불행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에 일단 주목하고 있다. 멋진 아이였던 세르쥬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가 알콜중독자로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단지 쇠락한 마을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까? 산업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면서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는 고향마을은 아마 당시 프랑스 사회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의 형상화였을 것이다. 프랑소와는 일찍이 고향을 떠나 새로운 꿈을 꾸고 있지만, 남아있던 친구들은 꿈을 상실한 채 하루하루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소와는 세르쥬의 불행이 첫아이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다.

 

쇠락한 마을, 도덕적 결함이 지배하는 마을이라는 거창한 에너지를 품어낼 것만 같은 공간속에서 세르쥬의 불행이 개인적인 이유라는 것은 자칫 영화가 심심해지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뭔가 큰 걸 기대했던 관객의 심리를 배반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샤브롤 감독이 <미남 세르쥬>에서 희망이라는 키워드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프랑소와가 마을로 돌아온 후 환영을 받는 이유는 그가 희망, 즉 미래를 위해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르쥬가 불행한 것도 알고 보면 희망의 상실에서 기인한다. 세르쥬가 프랑소와에게 묘한 질투를 느끼는 부분은 바로 이런 희망을 대하는 거리감에서 기인한다. 결국 샤브롤 감독은 쇠락한 마을과 같은 프랑스라는 조국이 감독자신과 같은 동년배의 젊은이들에게 작은 희망조차도 심어주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뭔가 큰 걸 바라는 건 아니다. 하나의 가능성으로서의 씨앗을 심어보고 싶은 것 뿐이다. 그러므로 <미남 세르쥬>에서 샤브롤 감독이 둘째 아이의 건강한 출산을 통해 활짝 웃는 세르쥬의 얼굴에서 영화를 끝내고 있는 것은 젊은이들에겐 거대담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작은 희망의 씨앗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다고 생각해 본다.

 

아마 이런 것들이 트뤼포나 고다르의 영화보다는 소박하지만 샤브롤의 <미남 세르쥬>가 더 감성적으로 가슴에 와 닿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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