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을 카피하다>는 내가 본 그의 영화중에서 가장 편하게 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그 전의 영화가 이란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밑바탕에 깔고 있어 좀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면 <사랑을 카피하다>는 역시 다른 나라가 배경이긴 하나 다루고 있는 주제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보편적인 것이어서 부담을 좀 덜었던 것이다. 이 영화는 이탈리아라는 나라와 공간이 중요한 영화는 아니다. 세계 어디라도 상관없는 것이다. 즉 공간보다는 주인공인 줄리엣 비노쉬와 윌리암 쉬멜이 전경에 배치된 후 보여지는 중경과 후경의 미장센과 엑스트라들이 더 중요한 영화인 것이다.
진짜 같은 복제품이라는 원제가 암시하듯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부부행세를 하는 가짜를 통해 삶 혹은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에 다가서려는 시도를 한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 중 일부가 주인공이 예전에 실제로 부부였을 것이라고 상상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런 해석은 키아로스타미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이런 생각은 이 영화의 진실에 다가서기가 좀 더 힘들어진다고까지 생각된다.
키아로스타미는 진품처럼 잘 만들어진 짝퉁도 나름대로 의미는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 짝퉁을 보거나 취하는 당사자는 지금 보고 있는 대상이 가짜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은 있다. 짝퉁을 진품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속임수이자 범죄가 되고 의미는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영화속에서 자신의 책을 홍보하러 온 영국작가 제임스 밀러와 골동품상을 운영하는 엘르는 진짜 부부라는 오인을 받게 된다. 이후 그들은 마치 진짜 부부처럼 부부간에 있을 수 있는 갈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화해도 하고 한다. 그들은 이 역할놀이를 진짜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종일관 두사람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영화에서 잠시 빠져나와 조연과 단역들에게 눈을 돌려보자. 일단 그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결혼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온 많은 신혼부부 혹은 예비부부들이다. 그들은 진품이다. 그 예비부부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행복한 미래다. 그래서 그들은 제임스와 엘르를 진짜 부부로 오인하고 그들에게서 자신들의 행복한 미래를 보고 싶어 한다. 이미 우리는 엘르가 결혼의 결과물인 아들로 인해 힘겨워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이므로 그 예비부부들의 미래가 단순히 달콤한 미래만은 아니다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예비부부가 그들을 보는 관점인 것이다. 그들은 짝퉁부부를 보며 진짜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키아로스타미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듯 하다. 두 번째 부류는 유물을 관람하러 온 관광객들이다. 그들은 진짜 유물을 확인하기 위해 저 멀리 아메리카나 아시아나 유럽 각지에서 시간을 들여 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진품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제임스와 엘르는 같은 조각품을 보며 의미를 다르게 생각한다. 그들은 관광객에게 그 조각상의 어떤점이 좋은가를 질문하며 대답을 들어본다. 아마 그 관점은 그 조각상을 직접 보기 전에 사진이나 텔레비전에서 봤을때의 관점과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제임스와 엘르는 사이좋게 걸어가는 늙은 부부를 본다. 힘든 세월을 이겨내고 같이 늙어간 부부의 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생각이다. 그 늙은 부부는 제임스와 엘르처럼 가짜 부부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보는 관점과 오인을 했든 진짜였든 우리가 얻는 정서적 만족감인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주인공으로 돌아와 보자. 제임스와 엘르는 점점 진짜 부부처럼 연기하는데 익숙해진다.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마치 진짜 남편과 아내에게 하는 것처럼 토해내며 상처를 할퀴고 또 어루만진다. 그들은 엘르가 신혼첫날을 보냈다는 호텔에 들어온다. 여기서 또 이것이 진짜 신혼 때 들어왔던 호텔인가 아닌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제 키아로스타미는 현실과 비현실마저도 애매모호하게 연출해 버린다. 진품같은 짝퉁은 오히려 더 진품처럼 보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짝퉁이라는 것을 환기시키는 것은 제임스가 9시 기차를 타야 한다는 제약뿐이다. 이제 엘르는 짝퉁을 넘어선 진실된 관계를 원하기 시작했고, 제임스는 어두운 공간에서 클로즈업으로 보여지며 그의 뒤로 난 창문으로 밝은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제임스가 어떤 결정을 했는지 알 수는 없다. 그가 9시 기차를 타고 떠나버렸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짝퉁 행세를 통해 뭔가를 해소했다는 것이다. 제임스가 화면에서 벗어나고 영화는 창밖의 풍경만 계속 보여준다. 어두운 곳은 짝퉁의 공간이며, 창밖은 진품의 공간이다. 어떤 장소가 더 가치가 있는 곳인가?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결론 대신 질문을 던질 뿐이다.
막연하게 진품을 직접 봐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진품을 확인하며 얻는 감동은 배가 될지도 모르겠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진품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르게 변환된 매체로 접했던 것들도 분명 인생에서는, 삶에서는 중요한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비싼 비행기 티켓을 사고 바다 건너 모나리자를 본 사람만이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악하게 인쇄된 사진이라도 개개인이 느끼는 감동은 동일할 수도 있다는 전제. 그렇게라도 위안을 받는다면 그건 더 좋은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오리지날에 대한 가치부여가 독점을 초래하고 더 나아가 제국주의의 단초는 아니었는지? 1세계와 3세계를 나누는 경계로 작용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란이라는 변방 출신 감독의 영화를 보며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을 카피하다>는 진품과 짝퉁이라는 경계를 허문 자리에서 많은 의미를 생산하는 영화인 것 같다. 대가의 영화라는 느낌. 그것이었다.
'외국영화 > 유럽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맘마 로마 Mamma Roma (0) | 2018.09.01 |
---|---|
탱고 Tango (0) | 2018.09.01 |
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 (0) | 2018.09.01 |
제3의 사나이 The Third Man (0) | 2018.08.31 |
동정없는 세상 Un monde sans pitié (0) | 2018.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