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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 리드 감독의 제3의 사나이를 보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캐롤 리드 감독은 왜 제3의 사나이를 만들었을까?>
확실히 재미있고, 완성도가 엄청나고, 너무 너무 근사하다.
그런데 이런 공인된 걸작을 두고 무슨 망발이냐고 방방 뛰어도..
그 속내가 궁금하다. 그리고 나는 그 속내에 이 영화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감독은 일자리를 찾아 전후의 혼란한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찾아온 미국의 3류 소설가 홀리 마틴의 모험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아니면 전후의 혼란한 상황을 이용해 악덕하게 돈을 버는 해리 라임의 파멸을 통해 사람답게 사는게 뭔가라는 윤리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만약에 그것도 아니라면 안나 슈미츠의 순수한 사랑을 통해 러브스토리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다 맞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2차 대전이 끝난 지 몇 년이 되지 않은 시기의 혼란을 통해 사랑과 우정, 그리고 실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일 것이다.
그러나 제3의 사나이의 영화적 결은 조금 더 깊은 곳에 닿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또한 그것이 이 영화를 더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 영화의 매력이 스타일에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내러티브로만 따진다면 이미 익숙한 내용이며, 특별히 더 철학적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없다. 완성도 높은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정도로 평가하면 딱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므로 캐롤 리드 감독의 야심은 다른 곳에 있어야만 한다. 그건 바로 이 영화가 유럽(영국)영화라는 것. 더불어 장르적으로 느와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느와르적으로 보이도록 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이 영화의 주인공이 미국의 대표적인 3류 페이퍼 작가라는 것, 즉 펄프 픽션의 작가라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느와르의 만개는 이 펄프 픽션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물론 리드 감독은 그것이 저급하다고 성급하게 평가하진 않지만 고급 문화로서의 유럽 문화라는 전제를 깔고 있기는 하다. 홀리 마틴의 강연 에피소드를 통해 지루해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여주거나 제임스 조이스를 언급하는 것은 펄프 픽션을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적이라고 생각되는 문화마저도 유럽(영국)의 문화조류로부터 기인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은 유럽(영국)이 전쟁을 통해 모든 면에서 미국에 뒤처지기 시작했지만 문화만은 그렇지 않다는 캐롤 리드 감독 개인의 자존심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러한 면은 스타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캐롤 리드 감독은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매체보다 영화에 대해 좀 더 진솔하게 발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49년은 이미 미국의 느와르 영화가 최고 정접에 도달해 있던 시기였고 유럽의 관객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름 느와르는 여전히 B급의 오락영화로 취급받고 있었을 테고, 누벨바그의 재기발랄한 평론가 군단들이 나타나 필름 느와르라고 명명하며 명예의 전당에 올리기 전이었다. 단지 미국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재미있는 장르영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적인 어떤 것, 미국만의 고유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펄프 픽션과 필름 느와르가 미국적인 것이라는 고유명사를 획득하려고 할 때, 캐롤 리드 감독은 모두가 YES라고 할 때 자신의 영화를 통해 NO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결과물이 제3의 사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치 필름 느와르에서 영향 받은 듯한 조명을 사용해 촬영하고, 범죄영화의 플롯을 가져오지만 그것은 이미 유럽에 존재해 왔던 것이기도 했다. 느와르적이라고 착각할만한 촬영은 자세히 보면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이 더 짙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의 내러티브는 멀리갈 것도 없이 영국의 알프레드 히치콕의 것처럼 진행되고 있다. 결정적으로 안나 슈미츠의 해리 라임에 대한 사랑은 팜므 파탈에 대한 한방의 일격이다.
즉, 유럽은 미국의 문화를 살찌웠지만 미국은 유럽에 범죄를 이식했다고 할까? 해리 라임이 미국출신이라는 것은 항상 강조된다. 또한 홀리 마틴의 존재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그의 작품이 최고라고 말하던 하급 군인은 결국 해리 라임의 총에 죽고 만다. 당연히 홀리 마틴은 안나 슈미츠의 사랑을 얻지 못한다. 왜 아니겠는가? 영화 사상 가장 인상적인 라스트라고 회자되고 있는 이 장면은 이런 함의가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가장 친한 친구를 자기 손으로 죽일 수 있는 미국이라는 문화를 굳이 껴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실존이 아닌 실용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안나는 독일어를 사용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할 수만 있었다면 비엔나가 아니라 베를린에서 촬영되었다면 어땠을까? 왜나하면 그곳은 독일 표현주의의 고향. 즉,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제3의 사나이가 미국 느와르 영화의 형식을 취하는 척 하면서 그 모든 것이 유럽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하고자 하는 캐롤 리드 감독의 야심이라고 할까? 아니면 우월감이라고 할까? 그런걸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느꼈다. 잘나가는 헐리우드에 대한 질투라고 해도 좋다. 어쨌든 이 영화는 미국영화에 대한 탐구이자 필름 느와르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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