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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음...
장 뤽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를 보고 생각난 단 하나의 단어는 이것이다.
그가 보여주는 화면은 1초에 24프레임이 지나가면서 움직이는 그림이 아니라 마치 스틸 사진이 모여 만들어내는 것 같은 분절된 움직임의 연속이었다. 첫 장면 나나의 얼굴을 클로우즈 업으로 왼쪽, 오른쪽, 정면을 찍은 쇼트는 마치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흐르다 끊기는 음악의 비연속성은 그녀에게 닥칠 죽음의 복선을 보는 듯 하지만 “네가 살고 있는 세상도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마찬가지로 험한 곳이야”라고 말하는 듯 불안하기까지 하다.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그저 그녀의 불행을 바라만 볼 것 인가의 선택은 이미 내게 있지 않았다. 그걸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감독인 장 뤽 고다르이며, 난 그저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낯선자로 돌변하고 만다.
그건 첫 번째 챕터인 (1장-술집-나나 떠나려고 하고 폴 절망한다.) 시퀀스에서 더 명확해진다. 나나와 폴은 시종일관 뒷모습만 보여준다. 그녀와 그의 모습은 앞에 있는 거울을 통해 간신히 유추해 낼 수 있을 뿐이다. 영화 이론책에서 줄기차게 보아왔던 180도 선이라는 것, 즉 관객이 등장인물들의 위치에 대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설정되어 있는 암묵적인 규칙이라는 것이 여기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카메라는 그저 두사람을 왔다 갔다 한다. 이건 패닝이라고 볼 수 도 없을 듯 싶다. 또한 사운드의 운용에 있어서도 특이하다. 나나는 “그게 무슨 상관이야”라는 대사를 톤을 달리하여 세 번 반복한다. 일견 나나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대사이지만 확실히 장 뤽 고다르 감독은 대사의 톤에 의한 사운드의 변화와 상태의 변화를 예의 주시했다고 보여진다. 그건 관객이 느끼는 감정의 변화도 영화속 사운드에 편입되어 하나의 미장센으로 형성되는 아주 좋은 장면으로 보인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친절하게 정보를 담고 움직이는 카메라와는 달리 <비브르 사 비>의 카메라는 마치 공원에 앉아 하릴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은 계속 일어난다. 나나는 오디션용 사진을 받기 위해 폴과 만나지만 카메라는 주위의 거리로 내달린다. 첫 번째 매춘에서도 카메라는 나나를 친철하게 돕지 않는다. 나나의 이야기는 방 안에 있는 각종 소품들에 묻혀 간다. 그러나 불친절하다고 생각했던 카메라의 움직임이 오히려 나나의 감정을 드러내는 혹은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는 분신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우선 2000프랑이라는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장의 제목(나나는 제 인생을 살아간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생존과 직결되는 돈이다. 각종 생활용품을 살 수 있는 돈이라는 것... 즉 나나에게 필요한 이런 사소한 것을 장만하기 위해 나나는 매춘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비정한 세상에 대한 고발인 것이다. 또한 카메라는 돈이라는 것이 움직이는 방식도 놓치지 않는다. 돈을 꺼낼 때의 빅 클로우즈업이나 돈이 건네질때의 빅 클로우즈업은 돈이라는 것이 어떻게 은밀하게 인간을 거래의 대상으로 만드는 가에 대한 고다르 감독의 시선이라고 느껴진다.
<비브르 사 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는 내부와 외부의 분리이다.
고다르 감독은 내부에 존재하는 나나의 모습은 안정되게 외부에 존재하는 나나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불안하게 처리한다. 우선 나나는 집(가장 안전한 내부)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얻지 못함으로써 거리로 내 몰리게 되고 결국은 죽음까지 맞게 된다. 1장에서 나나와 폴이 게임을 하기 위해 창가로 왔을떄 화면의 반이상을 차지하는 창밖의 공허한 파리의 모습은 앞으로 나나 혼자 고군분투 살아가야 할 장소이며, 옆에서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2장에서 레코드가게에서도 카메라는 나나의 대사와는 상관없어 거리로 패닝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지만 그들 역시 나나의 삶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로 나나의 고립감만 강조한다. 결국은 혼자라는 것... 과연 나나는 잘 해 나갈 수있을 것인가? 6장에서 나타나듯 안전한 내부와는 다르게 외부에서는 총싸움이 벌어진다. 그러나 나나는 이미 외부의 사람.. 7장에서는 라울을 만나는 까페에서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샹젤리제 거리가 나나의 뒤로 보인다. 그 모습은 마치 그 거리가 나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거리는 더 나아가 도시는 나나를 죽음으로 내몬다. 도시라는 공간은 한치의 동정심도 허용하지 않는다. 도심의 사운드는 내부에 있어도 언제나 침입해 들어온다. 6장에서의 총소리는 모든 것을 흔들어 놓는다. 총소리에 맞춰 움직인 카메라 혹은 흔들린 카메라 혹은 점프컷의 연속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유리문으로 나타나고 충분한 차단막이 되지 못한다. 결국 나나가 내부의 공간에서 안정적인 모습으로 앉아있다 해도 집을 잃어버린 그녀는 어디에 있어도 불안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영화가 소설과 다른 이유는 영상으로 이야기를 소화해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사로서 모든 상황을 이야기 해버리는 영화를 그다지 좋은 영화로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다르에 이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보이스오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방편으로 사용한다. 매춘에 대한 이 영화의 주제를 우리는 영상보다는 친절한 해설로서 먼저 인지하게 되고 나중에 비정한 영상으로 보충하는 셈이다. 아예 책을 읽어준다든지 하는 것은 고다르 영화에서 별로 낯선 장면은 아니다. 11장에서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 한다. 거의 모든 장면을 나나와 노인의 투쇼트로 채우는 과감함... 말이란 무엇인가 를 두사람의 대화를 통해 설명해 버린다. 과연 이것은 사운드와 화면의 충돌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몽타쥬의 또다른 버전으로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사실 <비브르 사 비>의 편집은 그다지 인과관계에 안절부절 하지 않는다. 편집에서는 쇼트와 쇼트를 부드럽게 연결해서 내용을 이어주어야 한다는 공식에 별로 연연해 하지도 않는다. 컷들은 무수히 점프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별로 어색하지 않는 것은 나나의 삶의 모습을 닮으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파리시내를 고개를 숙인 채 터벅터벅 걷는 나나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화면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어... 나의 신념은 지킬 수가 없어’하며 애원하는 듯한 표정은 결국 3장에서 칼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열정>을 보며 눈물 짓던 나나를 이해하게 만든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인 그녀와 살기 위해 매춘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녀들은 모두 시대 혹은 체제의 희생양 일 수밖에 없으니까.
낯설음... 그것은 결국 익숙한 것에 대한 파문이다. 파괴는 쉽지만 익숙한 것에 대한 파괴는 어렵다. 왜냐하면 아무도 파괴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 뤽 고다르는 경계를 뛰어넘은 작가라는 것을 이제는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2000.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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