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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영화/미국영화

붉은 강 Red River

구름2da 2018. 8. 31. 11:40



<붉은 강(Red River)>은 하워드 혹스감독의 첫 서부영화다. 이미 <스카페이스>나 <그의 연인 프라이데이>등 갱스터, 로맨틱 코미디, 전쟁영화등에서 걸작을 만들었던 혹스 감독이 경력의 절정기에 왜, 하필이면, 마침내 서부영화라는 장르에 발을 들여놓기로 한 것일까? 어쩌면 단순하게 얘기해서 서부영화는 가장 미국적인 장르로 알려져 있고,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아가 미국의 역사를 끌어안고 있는 장르라고 본 다면, 결국 서부영화라는 장르를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문제는 역사를 바라보는 감독의 관점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다. 그동안 거친 서부 사나이들의 일대일 결투의 스펙터클과 인디언 학살에 대한 무비판성, 청교도적 세계관, 포장마차로 대표되는 개척정신 등이 주요한 소재였고, 아직 수정주의 서부극이라는 세계관이 도착하기 전에, 하워드 혹스 감독은 <붉은 강>을 통해 좀 더 신화적인 공간으로 서부를 이동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서부영화라는 장르가 미국이라는 이미지를 표상하고 있다면 그 속에서 혹스 감독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생성과 발전과정을 파헤치려고 하는 것이다. 갱스터 장르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가지고 있는 가벼움, 더군다나 전쟁 영화는 이미 신화가 떠난 자리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한계를 지니지만, 가장 원초적인 공간으로서 서구의 시작이라 할 만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를 미국이라는 공간에 성공적으로 이식 시킬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서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붉은 강>에서 던슨(존 웨인)과 매튜(몽고메리 클리프트)의 관계가 오이디푸스적으로 보인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 로마 신화적 세계관과 확실히 다른 점은 던슨과 매튜가 혈연으로 묶여진 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마 감독은 순혈주의는 온전한 미국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민의 나라라고 알려진 미국이 아니던가? 미국은 처음부터 순혈주의와는 거리가 먼 나라였던 것이다. 이렇듯 혹스는 미국의 역사에 개입하기로 하면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원형을 정확히 집어낸 것이다.

 

또한 서부라는 공간이 남성들만의 세계였음도 분명히 하고 있다. <붉은 강>은 시작되자마자 공간속에서 여성을 지우는 작업에 착수한다. 팔찌로만 보여 지는 어머니의 존재는 던슨의 여자친구에게로 이어지지만 그녀는 그 흐름을 유지하는데 실패한다. 그 팔찌는 인디언의 팔로 옮겨지며 다시 던슨에게로 돌아간다. 어쩌면 이는 순혈주의가 아니라 하더라도 야만이라고 묶여질 인디언만은 제외시키고 싶은 무의식의 작용이리라. 어쨌든 그 팔찌는 다시 매튜에게로 이어지게 된다. 연인에게로 이어질 의무를 가진 어머니의 팔찌가 매튜에게로 가는 것을 보면서 소수의 학자들이 말하는 혹스의 영화에서의 동성애적 모습을 엿볼 수도 있겠지만 이런한 해석은 약간은 오버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동성애적 암시로 보기보다는 순혈주의에 대한 태도에서 바라보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는 던슨이 매튜에게 느끼는 감정은 분명 연인이 아닌 아들로서의 감정이며, 팔찌의 전달은 순혈주의를 대체하는 혈연으로서의 기능을 한다고 보는게 더 맞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분명 전통적으로 여성의 자리라 할만한 위치에 다른 남성인 나딘(월터 브래넌)을 세우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헷갈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기도 하지만 이미 서부라는 공간이 남성들의 공간임을 안다면 그리 이상하게 볼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하워드 혹스 감독은 서부의 공간에 어떻게 여성의 공간이 마련되는가에 대해서도 영화의 후반부에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런 소모적인 것이 아니라 매튜가 어떻게 던슨을 넘어서고 있는가하는 부분일 것이다. 어린 시절 인디언에 의해 부모를 잃은 매튜는 던슨을 아버지처럼 따르게 된다. 성인이 된 후에도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따르는 편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던슨이 고집을 꺾지 않을 때 매튜는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 거부는 아버지의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보를 위한 발걸음이다. 그리고 그 진보의 발걸음이 성공할 때 거친 사나이들이 세계였던 서부라는 공간에 여성의 자리가 마련된다. 던슨이 자신의 목장을 만들기 위해 포장마차를 떠날 때의 서부는 개척의 공간이었고, 여성의 자리는 마련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팔찌를 다음세대에 전달하는 것에 실패한다. 하지만 매튜가 넓은 목장과 소떼라는 던슨의 세상에 반기를 들고 도시로 들어서는데 성공했을 때 비로소 서부에는 여성의 자리가 마련되는 것이다. 아마 매튜의 연인 테스는 그 팔찌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것에 성공할 것이다.

 

그럼 여기서 더 중요한 것. 결정적으로 무엇이 던슨과 매튜를 갈라서게 했던가의 여부일 것이다. 소떼를 몰고 미조리주로 가는 여정에서 최고의 갈등은 철도를 찾을 것인가 말것인가의 여부다. 던슨이 외면한 건 바로 철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들에게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도 했고 여자(테스)를 차지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던슨에게 대항하며 매튜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차와 기찻길을 찾았으며 그것을 건너간다는 것이다. 그곳엔 넓은 초원 대신 도시가 건설되어 있다. 그리고 매튜는 돈(자본)이라는 경제개념으로 소들을 팔고 많은 이윤을 취하게 된다. 이는 아버지라는 상징계를 넘어서며 발전했던 서구의 역사이자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첨가한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매튜는 결국 철도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는 것이고 던슨은 말에서 내리지 못했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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