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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영화/미국영화

셰인 Shane

구름2da 2018. 8. 27. 20:56



유명한 서부극 셰인을 이제야 봤는데 기존의 서부극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 다름이 뭘까 궁금해져서 일단 내 나름대로 한번 분석해 보기로 했다.

 

한명의 서부 사나이가 공동체로 흘러 들어와서 그 공동체를 위협하는 악을 처단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는 익숙한 패턴은 영화 <셰인>에서도 반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짝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영화 <셰인>이 설정하고 있는 시간. 즉 셰인과 인물들이 발딛고 있는 공간과 시대였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교집합으로 교차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개척으로 상징되던 서부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면서 나아가서는 인식의 변화, 즉 패러다임이 서서히 변해가고 있는 혼돈의 시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타렛과 라이커의 대립 역시 이러한 시간이 만들어낸 풍경이기도 할 것이다. 정착과 울타리 치기와 그것에 대한 거부야 말로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영화의 핵심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일까? 영화에서는 내내 울타리와 그 비슷한 구조를 많이 보게 된다. 작게는 텃밭을 규격화하고 있는 끈에서부터 넓게는 집과 목장을 규격화하고 있는 울타리까지. 스타렛은 울타리를 만들고, 라이커는 그것을 부수고 있다. 그렇다면 셰인은 어떤가? 그는 울타리의 일부를 사용해 만든 출입문을 사용한다. 셰인이 스타렛의 집으로 들어올때는 울타리가 아닌 냇가(늪?)를 건너서 들어오지만 그가 떠날때는 대문을 열고 나가지 않는가?

 

시대가 변하면 필연적으로 사라져야 할 것들이 있다. 그들은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소멸하거나 강제적으로 퇴출되거나 그런식으로 대체적으로 사라진다. 그런면에서 공동체의 법과 협력을 강조하는 스타렛은 서부개척시대 이후에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물일 것이다. 그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들. 가족, 집, 법, 공동체는 정착을 통한 확장의 일차조건이다. 반면에 라이커는 어떤가? 아주 전형적인 악인의 이미지로 그려져 좀 평면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그는 스타렛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통해 시대의 요구를 거부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법과 협력을 거부하고 이제 생명을 다한 카우보이와 총잡이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인물이다. 그가 울타리를 부수거나 아웃로적 총잡이를 고용할 때이미 그는 사라져야 할 대표적인 인물임을 자인한 셈이다.

 

이렇게 볼때 셰인이라는 인물은 스타렛보다는 오히려 라이커와 더 유사한 인물이다. 나는 특히 그의 의상에 주목하게 되는데, 일차적으로 셰인의 의상은 기존 서부의 사나이나 카우보이, 아웃로의 복장과는 좀 다르게 인디언을 연상시키고 있다는 것이 아주 흥미로웠다. 이는 어쩌면 서부개척시대가 시작되면서 어쩔수 없이 인디언들이 사라져야 했듯,  시대가 변하면서 서부의 사나이의 운명도 인디언과 똑같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장치가 아닐까 싶다. 셰인은 자신을 인디언과 동일시하면서 이제 사라져야 함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이 기어코 변화를 거부하며 버티고 있는 라이커와 비슷하지만 차별화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셰인이 인디언풍의 옷을 벗고 공동체의 일원과 똑같은 옷을 입었을때 그는 더 이상 총잡이 이기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가 다시 총을 잡기로 결심했을 때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 죽은 어미의 모습처럼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공동체를 구하기 위한 자기희생이 느껴진다. 셰인은 이미 시대를 놓친 자로서의 자기연민을 스스로 체득하고 있기 때문에 더 안타깝운 비극적 파토스가 느껴진다. 그래서 저멀리 떠나는 그의 뒷모습이 그렇게도 쓸쓸한 이유일 것이다. 아무리 불러도 공허한 메아리만 되돌아올 뿐 사라지는 것은 항상 추억으로 남아 새로운 세대(조이)의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 영화가 은근히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셰인이 잠시나마 스타렛의 집에 머물게 된 것이 과연 그의 정의감 때문일까? 그가 머물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는 것은 스타렛의 부인인 마리안이다. 그녀는 “점심이 곧 준비될거다”, “자고 가라고 했느냐”며 스타렛을 부추긴다. 특히 점심을 먹은 후 스타렛과 셰인이 거대한 나무의 밑둥을 잘라낼때 남편은 윗옷을 입고 있는 반면, 셰인 혼자 윗옷을 벗고 있음은 이 장면이 마리안과 셰인의 욕망이 투영된 장면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물론 영화속에서 은밀한 섹슈얼리티는 도드라지진 않는다. 또한 그것이 감독이 의도한 것도 아니다. 재미를 위한 하나의 서브 플롯으로 활용되지만 시대의 변화는 아마 청교도적인 금욕주의의 변화도 함께 동반하는 것이니, 주제의 연장선상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보다 감독은 그런 은밀한 욕망을 유려한 미장센으로 드러낸다. 대표적인 장면으로 독립기념 축제를 위해 마리안이 드레스를 고를 때, 여러개중 하필이면 웨딩드레스를 선택하는 건 이미 셰인과의 댄스를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마리안의 욕망은 점점 증폭되어 간다. 그녀는 두명의 남편을 원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건 도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며, 이혼도 새로운 공동체 건설에는 치명적일수  있는 가족의 해체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 좀 더 나아가 청교도적인 도덕주의에 대한 갈망을 50년대의 미국 대중은 원했을 수도 있고 말이다. 이러한 위태위태한 도덕의 타락을 중재하는 인물이 바로 아들인 조이다. 영화속에서 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감시자의 역할인데, 마리안과 셰인의 욕망이 표출되려고 할때마다 끼어들어 이성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조이는 기록자의 역할도 동시에 하게 되는데, 셰인의 정의감을 목격한 유일한

인물이 바로 조이다. 더불어 조이는 밝은 미래의 상징이다. 총을 버리고 법과 공동체의 가치를 발전시킬 희망인 것이다. 그러므로 조이는 셰인과 같이 살 수 없는 것이다.

 

조지 스티븐스 감독은 시대가 변하는 미묘한 시공간을 의미있게 포착했고 영화도 무척 재미있게 봐 만족스럽다. 대단한 걸작이라고 호들갑을 떨기 보다는 일정한 성취를 이룸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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